조건 없는 사랑이 아이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린드 부인이 오지 않는다니 잘됐군, 그 여자는 말 많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할망구라고."
"매튜 오라버니 정말 놀랍군요. 앤이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알면서 그 애 편을 들다니요! 이젠 앤에게 벌을 줄 필요도 없다고 하시겠죠!"
"글쎄다.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야. 벌은 조금 받아야지. 그래도 너무 심한 벌은 주지 마라. 마릴라. 잘잘못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아이잖니. 그런데.... 앤한테 뭐라고 먹을 걸 가져다주긴 할 거지?"
"내가 버릇 고치겠다고 누굴 굶긴 적 있어요? 끼니는 때맞춰서 직접 들고 올라갈 거예요. 하지만 린드 부인에게 사과하겠다고 스스로 말하기 전까지는 방에서 나올 수 없어요. 이 일에 참관 마세요. 오라버니."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복도를 지난 매튜는 동쪽 다락방 앞에서 몇 분이나 서있다가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리고 안을 들여다봤다.
앤은 창가 노란 의자에 앉아 애처롭게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작고 가엾던지 심장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매튜는 살며시 문을 닫고 살금살금 앤에게 다가갔다.
"앤"
누가 들을 새라 매튜는 나지막이 말했다.
"좀 어떠냐. 앤?"
앤이 힘없이 웃었다.
"괜찮아요. 상상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러면 시간을 보내는데 도움이 되거든요. 물론 외롭긴 해요. 하지만 이런데 익숙해지는 편이 나아요."
앤은 자기 앞에 놓인 길고도 외로운 유폐 생활을 씩씩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듯 다시 웃었다.
마릴라가 금방 돌아올지 몰라 매튜는 다락방에 올라온 이유를 앤에게 얼른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쎄다. 앤. 시키는 대로 하고 얼른 끝내는 게 낫지 않겠니? 언제 해도 해야 할 일이 잖아. 마릴라는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물러서는 법이 없단다. 절대 고집을 꺾지 않는다니까. 앤. 얼른 하고 끝내버리렴."
"린드 아주머니한테 사과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래, 사과... 사과 말이다. 그냥 원만하게 잘 마무리하자는 거야. 내가 하려던 말이 그거란다."
매튜가 다정하게 말했다.
앤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아저씨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안하다고 말해도 이젠 거짓말이 아니고요. 지금은 미안하기도 하거든요. 어젯밤에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어요. 어젠 정말 화가 났고 밤새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어요. 밤에 세 번이나 깼는데 그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걸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더는 화가 안나는 거예요. 그저 지칠 대로 지친 느낌만 있었어요. 제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린드 아주머니를 찾아가 그렇게 말하자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너무 창피하잖아요. 그러느니 이 방에서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죠.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 정말로 제가 그러길 바라신다면..."
"그럼 바라고 말고. 네가 없으니 아래층이 여간 쓸쓸한 게 아니야. 어서 가서 좋게 해결하자. 그래야 착한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