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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Nov 16. 2023

앤 셜리, 처음으로 사과하다 2

조건 없는 사랑이 아이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최근에 읽은 < 아이 내면의 힘을 키우는 몰입 독서> 푸름 아빠 최희수 저자의 말에 따르면 부모의 내적 불행이 아이를 힘들게 만드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아이가 책을 읽고 지적 성장을 하려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아이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엄마와 아빠를 믿기 때문에 그 행동을 한다. 정서가 안정되어있지 못하면 지성의 발목을 붙잡게 되므로, 아이의 책 읽기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이 되더라도 몰입까지는 이르지 못한 저자는 말한다. 결국 아이가 무언가 스스로 배우게 하고 싶다면 믿음과 확신을 주어서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대상은 매튜였다. 마릴라가 교육을 담당하면서 잔소리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매튜는 신뢰와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역할이었다. 매튜는 앤이 아무리 수다를 떨어도 싫다는 말 없이 다 들어주고 받아주는 믿음의 존재였던 것이다. 사실 매튜가 이전까지 삶에서 동생과 이웃 외에는 여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것에 비하면 자기 스스로도 놀랄 만한 '듣기 능력의 발견'이 아닌가 싶다. 아빠가 딸에게 하는 사랑이 딸바보 수준이고 조부모가 손주에게 주는 사랑이 그렇듯이 매튜는 그 애를 그 자체로 좋아했다. 그리고 앤을 지키겠다는 한 가지에서 만큼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매튜는 평생 농장일 하는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앤에 대해서만은 확고하게 대변한다. 평소에 말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단 몇 마디에도 그의 말은 힘이 있었다. 마릴라가 자기 오빠에게 불평하면서도 거스를 수는 없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그만큼 앤과 마릴라의 갈등 속에서 매튜의 역할은 중요했다.




"린드 부인이 오지 않는다니 잘됐군, 그 여자는 말 많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할망구라고."
"매튜 오라버니 정말 놀랍군요. 앤이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알면서 그 애 편을 들다니요! 이젠 앤에게 벌을 줄 필요도 없다고 하시겠죠!"
"글쎄다.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야. 벌은 조금 받아야지. 그래도 너무 심한 벌은 주지 마라. 마릴라. 잘잘못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아이잖니. 그런데.... 앤한테 뭐라고 먹을 걸 가져다주긴 할 거지?"
"내가 버릇 고치겠다고 누굴 굶긴 적 있어요? 끼니는 때맞춰서 직접 들고 올라갈 거예요. 하지만 린드 부인에게 사과하겠다고 스스로 말하기 전까지는 방에서 나올 수 없어요. 이 일에 참관 마세요. 오라버니."
 

방에 갇힌 앤의 단식투쟁이 지속되는 동안 매튜는 남은 음식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마치 엄마와 딸의 싸움에 끼인 아빠처럼. 제삼자의 역할이 되어 차분히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이 일에 감정 없이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었다. 그러나 마릴라가 알면 간섭한다고 기분 나빠할 것을 알 테니 동생이 밖에 나간 사이 조용히 앤의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아이를 달랜다. 그 과정을 지녀보자.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복도를 지난 매튜는 동쪽 다락방 앞에서 몇 분이나 서있다가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리고 안을 들여다봤다.
앤은 창가 노란 의자에 앉아 애처롭게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작고 가엾던지 심장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매튜는 살며시 문을 닫고 살금살금 앤에게 다가갔다.
"앤"
누가 들을 새라 매튜는 나지막이 말했다.
"좀 어떠냐. 앤?"
앤이 힘없이 웃었다.
"괜찮아요. 상상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러면 시간을 보내는데 도움이 되거든요. 물론 외롭긴 해요. 하지만 이런데 익숙해지는 편이 나아요."
앤은 자기 앞에 놓인 길고도 외로운 유폐 생활을 씩씩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듯 다시 웃었다.
마릴라가 금방 돌아올지 몰라 매튜는 다락방에 올라온 이유를 앤에게 얼른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쎄다. 앤. 시키는 대로 하고 얼른 끝내는 게 낫지 않겠니? 언제 해도 해야 할 일이 잖아. 마릴라는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물러서는 법이 없단다. 절대 고집을 꺾지 않는다니까. 앤. 얼른 하고 끝내버리렴."
"린드 아주머니한테 사과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래, 사과... 사과 말이다. 그냥 원만하게 잘 마무리하자는 거야. 내가 하려던 말이 그거란다."
매튜가 다정하게 말했다.
앤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아저씨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안하다고 말해도 이젠 거짓말이 아니고요. 지금은 미안하기도 하거든요. 어젯밤에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어요. 어젠 정말 화가 났고 밤새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어요. 밤에 세 번이나 깼는데 그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걸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더는 화가 안나는 거예요. 그저 지칠 대로 지친 느낌만 있었어요. 제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린드 아주머니를 찾아가 그렇게 말하자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너무 창피하잖아요. 그러느니 이 방에서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죠.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 정말로 제가 그러길 바라신다면..."
"그럼 바라고 말고. 네가 없으니 아래층이 여간 쓸쓸한 게 아니야. 어서 가서 좋게 해결하자. 그래야 착한아이지."

매튜는 중재에 성공했다! 그런데 막상 해놓고 자기 자신도 본인의 능력에 놀랐다. 그리고 동생에게 들키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나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리는 그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대화에서 중요한 핵심은 앤이 린드 부인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는 매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앤은 분노가 가라앉은 후에도 스스로 사과를 하러 갈 만큼 자발적인 용기가 부족했다. 또 자책감으로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이럴 때 매튜는 앤이 정서적으로 다시 평정심을 찾고 사고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이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고 사는 나로서는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교육의 목적은 아이 스스로가 '사고' 하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이라는 걸. 가끔은 잊어버리고 아이의 잘못한 행동을 지적하느라 잔소리 폭탄에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매튜는 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야기하기보다 앤의 존재가 얼마나 우리 집에서 중요한지 일깨워준다. 사과가 비록 불편한 상황을 견뎌내는 일이고, 린드 부인의 부당한 행동을 용서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도 자기를 믿고 한번 해보라는 매튜의 말. 아저씨가 뒷받침해 줄 테니 용기 내봐. 너도 그 아줌마한테 정신적으로 지지 않았다는 오기를 보여줘. 피하지 말고 나가서 네 존재를 보여줘!  이 메시지를 들은 앤이 비로소 일어난다. 우울하고 자신 없는 자기 자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실 앤이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앤이 머리가 나빴더라면 명확하고 냉철한 마릴라의 역할이 더 옳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행동에 '그럴 수도 있지 뭐' 라거나 자기가 화를 낸 것이 이 집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앤은 그런 게 아니고 단지 감정이 상한 것이다. 간신히 집과 가정을 얻은 자기의 처지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줌마와 아저씨의 고마움도 모르는 것도 아니며 자기가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지만 자기 기분만은 자기가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시간이 가며 이 감정이 누그러지고 남는 건 자책감과 부끄러움뿐이었다. 매튜가 도와주자 앤은 쉽사리 해결책들을 찾아내 재빠르게 처신하고 행동한다. 자신의 단점이자 콤플렉스인 '욱'하는 성격의 뒷면에는 빠른 판단력과 행동력이 숨어있었던 것. 그리고 정말 우습게도 자기와 싸운 린드 부인 역시 말하기 좋아하고 '욱'하는 편이라 앤이 사과하자 생각보다 쉽게 용서해 주었다. 린드 부인은 앤의 과장되고 입에 발린 사과일지라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던 듯하다. 오히려 진심 어린 사과보다도 효과가 더 나았다. 린드부인이 생각이 그렇게 깊은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집에 갇혀서 원망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이었다. 앤을 묶었던 그 분노가 풀렸기 때문이다. 이 과정도 막상 해보니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걸. 앤 셜리는 처음으로 배웠다.


독서는 단지 교육적 차원을 넘어서 인생에 대해 반성하는 차원으로 발전한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했는가.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억울하고 속상한 감정들을 느꼈었다. 어릴 때 학교에 갔다 갑작스럽게 이유 없이 선생님에게 맞았던 경우라던가 변명할 여지도 없이 억울하게 벌을 받았다던가. 아니면 내 능력보다 어려운 걸 시켜서 못하는 것을 마치 내가 능력이 아예 없는 것처럼 비난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자 단체에서 갑작스레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나를 모략하는 사람이나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회에서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 농담이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계속 그들을 미워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오로지 그들을 미워할 이유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사람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냐고. 그건 내 감정에 기반한 당연한 질문이었다. 나만 생각했으니. 아니 내가 중요한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감정이 중요했다.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의 체면과 얼굴을 생각하지 않았다. 내 주변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지 않았었다. 내가 화를 내면 우리 엄마가 어떤 처지에 놓일지 생각하지도 않았다.  엄마는 아마도 내가 부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와 나의 관계에 있어 엄마가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알지도 못하고 또 정말 내 부모 얼굴을 생각해서 참거나 사과하지도 못했다. 앤이 매튜를 믿어서 '한번 해볼게요'라는 말을 나는 직접 해보지 못했으니 나의 사회적 정서적 성장은 미움 그다음을 넘어서지 못했다.

단언컨대 쌓아놓은 미움은 풀지 않는다면 몇십 년이 가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모두가 그것을 잘 알듯. 아마 나랑 안 좋았던 그들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많이 쌓아놨겠지.


미움은 우리의 무의식 속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서 언젠가는 반드시 치워야 할 날이 온다. 무언가가 가득 자리 잡은 창고에는 길이 없으니 말이다.  마릴라가 자기 친척 아주머니로부터 들었던 말을 정리하는 데는 50년이 필요했다. 어떤 미움은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으니 무덤 앞이나 일기장에라도 적어야 한다. 그때 정말 미안했다고.

앤 덕분에 내 감정에 나를 맡기는 대신 내가 정말 믿어야 할 사람들과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물론 감정도 감정 나름 대로의 가치가 있지만 말이다. 감정은 결국 일순간에 일어나 솜사탕처럼 녹아버리거나 검은 연기처럼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렇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다시 생각한다. 나는 인간관계 안에서 살아있는 것이며 결국 내가 한 행동에 대한 결과가 나를 만든다는 것을.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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