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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저너리 Jan 27. 2020

[에세이 85] 지독한 멀미를 멈추는 법

[정인의 크루에세이] 한 살을 더 먹는 건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요?


올해도 귀성길은 꽉 막혔다고 했다.

cctv 같은 도로 현황 카메라에는 귀성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차들이 보였고, 그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찌뿌둥한 기지개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텅 빈 서울을 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날이기에 차례를 다 지내자마자 집을 나왔다. 평소라면 자리가 없을 동네 스타벅스도, 차로 꽉 차는 도로도 텅텅 비어서 헛헛하게 여유로운 서울이었다.


그리고 카페에 앉아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이가 한 살씩 많아지면서 다르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톰과 제리에서 톰이 안쓰러워지면 어른이라던데,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이고 공감이나 이해가 가는 이야기들이 점점 많아진다.


새해 첫 영화로 본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그랬고 아주 예전부터 한 번씩 꺼내 듣게 되는 존 메이어의 'stop this train' 이 그랬다.

(이 아래로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아주 예전 학교 음악실에서 봤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내게 magic waltz로 불리는 명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였다.


폭풍우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피아노 고정쇠를 풀고 파도에 따라 왈츠를 추듯 움직이는 피아노, 그리고 그 위에서 아이 같은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던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드.'


그는 배에서 나고 자라 한 번도 배를 떠난 적이 없는, 버지니아 호'라는 배에만 소속된 사람이었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버지니아 호의 피아니스트로 사는 나인틴 헌드레드. 육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음악과 버지니아 호에서의 삶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배와 육지를 잇는 좁은 계단 '트램'을 건너 육지로 가려는 마음을 먹게 되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차분하게 트램을 내려가던 그는 계단 한가운데에서 멈추고 만다. 트램 위에서 드넓은 뉴욕의 전경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 그리고 더 이상 계단을 내려가지 못하고 멈춰 선 그를 보고  난 이상하게도 존 메이어의 명곡 'stop this train'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Stop this train I want to get off and go home again
이 기차를 멈춰주세요 내려서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I can't take the speed it's moving in
기차가 달리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요

I know I can't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But honestly won't someone stop this train
누가 이 기차 좀 멈춰줄 수 없나요?


배에서 내리지 못하는 나인틴 헌드레드,

너무 빠른 이 기차를 멈춰달라는 존 메이어


그 두 사람에게서 느끼던 묘한 동질감의 이유를 영화 마지막, 자신을 찾으러 온 친구의 손길을 거절하며 폭파되는 배에 남아있겠다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대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넌 그 도시의 끝을 볼 수 없어. 그 끝 말이야.
그 트랩 위에서 보는 도시는 멋있었어.
나는 걱정 없이 내려가고 있었어.

나를 멈추게 한 것은 내가 본 것들이 아니라,
내가 못 본 것들이야.
그 거대한 도시에 모든 게 있었어. 끝만 빼고.
그 모든 곳이 끝나는 세상의 끝.
피아노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어.
88개의 건반은 유한하지만 우리는 무한해.
우리가 만드는 음악도 무한해.
끝도 없는 그 건반은 무한하지.

그건 내가 앉을자리가 아니야.
그건 신이 연주하는 거야.
그 많은 길들 중 어떻게 하나를 선택해?
내가 바라보는 풍경들, 이 모든 세상은 나를 짓누를 뿐이야. 난 이 배에서 태어났어. 세상이 날 스치고 지나갔지.

내게 소원이 있다면 이 배의 선수와 선미 사이에 머물기를 바랄 뿐이야. 난 여기서 행복한 연주를 해. 무한하지 않은 건반을 연주해. 육지는 내게 너무 큰 배고,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고, 너무 긴 여행이야.
육지는 내가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야.
정 그렇다면 이 삶에서 내리겠어.

난 존재하지 않았어.
너만 빼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몰라.
날 용서해. 난 안 내릴 거야."

내게 나이를 먹는 건 매일 내가 마주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두려움을 대비하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알지도 못했고 알 필요도 없었던 것을 마주하는 것.


나인틴 헌드레드가 끝을 알 수 없는 건반이라고 이야기한신의 연주에서 그다음 음계를 추측하려 애쓰는 것이고, 존 메이어가 노래 속에서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삶이라는 기차를 멈춰달라고 하는 이유가

요즘의 내가 나이가 한 살씩 많아지는 게 두려운 이유 같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며 든 생각은,

이 두려움 속에서도 내가 온전히 소속될 수 있는 그리고 소속되고 싶은 '나만의 버지니아호'를 찾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배 위에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지, 영화의 주인공처럼 배에 머무르고자 할지 알 수 없지만. 우선 그 배를 찾아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는 것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지독한 멀미를 이겨내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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