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사정으로 참 이사를 많이도 다녔다. 이제 이사라는 단어만 들어도 어깨랑 머리가 아프다. 책이나 인터넷으로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경험도 많이 했다. 그래도 이사는 힘들고 몸과 영혼 그리고 관계에 축을 낸다.
이사 갈 집이 몇 주 먼저 비게 되어 나는 5,000원짜리 수례를 사서 큰 봉투에 책과 옷가지, 이불 등을 십 수 차례 손으로 옮겼다. 포장이사를 하게 되면 결국 내 물건을 못 찾아서 다시 정리를 해야 하는 것이 더 큰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빈 집에 잔짐을 직접 옮기는 일은 오히려 신이 났다
신발장을 소독하고 신발장의 70 퍼센트 정도를 책장과 앨범장으로 개조했다. 책이 눈에 안보이니 참으로 많은 부분이 정리가 되었다. 내친김에 그릇들도 미리 닦아 뽁뽁이로 싸서 한 번에 두상자씩 뚜껑이 달린 플라스틱 수납상자에 담아 제자리에 옮겼다. 높이가 낮은 컵 수납을 위해서 부엌 수납장에 선반도 두세 개 더 추가했다. 그릇도 어느 정도 수납 완료.
붙박이장이 있으니 원목 옷장 두통은 버려야지 하다가 그래도 살려면 비싼 거라 결국 이삿짐에 실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한켠에 내가 좋아하는 원목 책상을 놓고 독서도 하고 작업도 하려고 했는데 버리지 못한 옷장 때문에 그 공간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일단 안 보이게 모든 짐들을 제자리 남의 자리 가리지 않고 숨겨 놓고 잠시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 길고 무거운 좌탁을 어디다 두지?
창문을 멍하니 보는데 차가운 베란다 타일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쪽마루를 깔려고 했었지... 이 좌탁을 두면 어떨까? 눈썰미가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내부 공간에서는 잘 안 어울리고 좀 큰듯한 요 책상이 베란다에 두니까 평상 같기도 하고 툇마루 같기도 하고 아주 딱이다. 야호!
그리고 아이가 발레학원 할 때 화분도 놓고 전단지도 올렸던 플라스틱 이동용 책상을 펼쳐 놓으니 툇마루에 앉은 듯 별도의 의자 없이 독서하기도 노트북 하기도 공간이 너무 좋다. 야호, 야호!
집안의 일들이 무거워져서 나만의 숨 쉴 공간이 필요할 때 몸을 옮겼던 이 공간, 오랜만에 책을 읽다 너무 맘이 좋아서 후배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이런 공간을 '슈필 라움'이라고 한단다. N 지식백과에는
슈필라움 :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가지 수 있는 나만의 놀이 공간을 뜻하는 말로, 독일어 '놀이(Spiel)'와 '공간(raum)을 합쳐 만든 말이다.
라고 되어 있고 독일어 사전을 보면 연극 공연장, 활동의 여지, 여유 공간 등으로도 나온다.
그저 버리지 못한 가구와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을 뻔한 이 베란다 공간이 후배의 '언니만의 슈필라움' 이라는 코멘트 한 번으로 내가 쉬고 놀면서 창작하는 나만의 슈필라움이 되었다.
봄이 되면서 종로 꽃시장에서 들여온 제라늄과 허브가 예쁜 이 베란다 공간을 이제 아이도 참 좋아한다. 이 공간에서 화분 흙도 갈고, 콩나물도 다듬고 최근에는 금귤 콩포트를 만들려고 꼭지 따서 말리는 작업도 여기서 했다. 건조기를 잘못 돌려 쪼그라든 이불을 러그처럼 깔면 간이침대가 되고 강아지가 더 좋아하는 쿠션을 두면 소파가 되는 나만의 슈필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