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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May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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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교수 M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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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양,  들어요. 내가 해줄  있는 말은  것뿐이에요. 힘들겠지만 꾸준히 노력하세요. 스터디그룹을 만들거나 주변 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 다른 학생들을 기다리게 하는 일은 없어야겠죠? 자, 그럼 이만 다음 수업시간에 봅시다."



 면담에서 나를 향해 차갑게 충고의 말만 남긴 담당교수 M을 나는 줄곧 미워해왔다. 하지만  감정은 <미움>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기에는 조금 복잡했다. 왜냐하면  대상이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

"너네 그거 알아? M 교수는 이제야 겨우 사십 대 중반인데, 지금까지 쓴 논문이며 학위 개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거?"

"어, 나도 학교 홈페이지에서 봤어. 심지어 그는 러시아에서 대학을 마치고 온 거잖아. 심지어 학사 전공도 세 개야. 게다가 그는 독일인인 나보다 독일어를 더 잘해."

"당연하지, 그는 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독일에 유명한 H대학교에서 석박사를 모두 마쳤는걸? 그리고 프랑스어까지 유창하게 하잖아"

"맞아. 또 그가 1년에 쓰는 논문 개수가 어찌나 많은지, 우리 학교 교수 중에 제일 많을걸?"


M 교수와의 면담 후 같은 반 친구들에게 이러한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에 대한 나의 견해는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다. 그저 <미움>에 <재수 없음>이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그래? 아주 똑똑한 인간이구만? 그나저나 러시아 억양이 있어서 러시아 출신인지는 알았지만, 대학을 마치고서야 독일에 온지는 몰랐네. 그럼 뭐야, 나와 같은 처지에는 있어봤지만 자기는 엄청 똑똑해서 내 상황을 아예 이해를 못하는 건가? 잘났어, 정말.'



#2

 그로부터 나에게 밉고 재수까지 없는 교수로 낙인찍힌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학업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저번 면담에서 그에게 준 인상을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던 것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M 교수의 수업의 가장 열성적인 학생이 되었다.


M 교수는 매번 독특한 수업자료를 가져오기로 유명했는데, 예를 들면 단어 하나 없이 그림으로만 가득 찬 자료로 미디어 정책 또는 미디어 경제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림이라 해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어서, 예를 들어 미디어 경제학의 첫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은 요트에 매달린 공이 그려진 수업자료만 내내 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것은, 그의 수업만큼 이해가 잘되고 흥미로운 수업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그는 문답을 통해 학생들의 흥미와 이해를 이끌어냈고, 비판적 사고를 하게끔 도와주었다.


하지만 독일어로 듣는 수업을 버거워하던 나에게, 글자 하나 없는 수업자료와 추상적인 질문들로 이끌어가는 수업은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수업 내용을 그 자리에서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로 바로 옮겨 담지 않으면, 수업 내용을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 시간 내내 감탄을 하며 그의 수업을 듣기만 하다 보면, 수업이 끝난 후에는 텅 빈 노트를 보며 땅을 치고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나에게 밉고, 재수 없고, 똑똑해서 얄밉기까지 한 교수가 되었다.



#3

첫 학기에서 단 한 과목도 낙제를 하지 않고 통과하게 되었을 때, 내가 가장 기뻐한 일은 M 교수의 수업을 재수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학기에 그는 다른 필수 과목을 맡았다. 2학기는 모든 수업이 영어로 이루어졌는데, 교수들은 대체로 영어를 잘했지만 그래도 독일어 억양이 분명하거나 말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나에게는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M 교수는 역시나 밉고, 재수 없고 똑똑해서 얄미운 교수인 만큼 영어도 유창하게 잘했다.


2학기에 M 교수가 강의하는 수업은 <시장 조사(Markt Recherche>였는데, 학생들은 여덟 개로 조를 나누어 조사 방법을 택해야 했다. 기말고사는 조사 방법대로 교수가 정해준 대로 조사를 수행하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조가 만든 프레젠테이션을 모든 학생이 공유해서 시험 자료로 쓰게 된다. 이 수업은 매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 학년 학생들의 팁을 얻을 수 있었는데, 교수가 말한 대로만 준비를 하면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학생들은 '역시나 똑똑한 본인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최고겠지'라며 혀를 찼다. M 교수가 똑똑해서 얄밉다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 학생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세명이 한조를 이룬 다른 조와 달리, 우리 조는 나와 K 단 둘 뿐이었다. K는 첫 학기 때부터 가장 친하게 지냈던 여학생이었는데,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통성명을 한지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그녀는 본인이 임신 두 달 째라고 귀띔해주었다. M 교수와 면담을 했을 때도 그녀도 함께였는데, 그녀는 임신을 했다는 타당한 이유로 나와는 다르게 몇 가지 수업을 듣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2학기가 되자 그녀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왔고 그만큼 그녀의 체력도 급격히 줄어드는 듯했다.


M 교수에게 조별로 과제 검사를 맡으러 갔을 때, 그는 우리 둘을 아주 불안한 눈빛으로 번갈아 보았다. 깍두기 같은 애들 두 명이 조를 이뤘다니, 완벽한 것을 좋아하는 교수의 눈에는 벌써부터 결과가 빤히 보였으리라. 더군다나 나와 다르게 그녀는 고등학생 때 독일에 와서 9년째 체류 중이었지만, K도 사실은 체코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이 외국인 둘에게 주어진 조사 방법은 불행히도 <설문 조사(Befragung)>였다.


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언어도 문화도 낯선 곳에서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하는 동안 눈칫밥이라는 게 생긴다. K와 나는 우리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M 교수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려 노력했다. 프랑크푸르트 도심 한복판에서 낯선 사람들을 붙잡고 설문조사를 하고, 최대한 교수가 말 한대로 발표 자료를 준비했다.


드디어 돌아온 발표날, 앞선 일곱 개 조의 발표를 듣는 M 교수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발표가 거듭될수록 그는 표정과 제스처 그리고 구사하는 언어 모두를 동원해 결과물이 본인의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질수록 강의실 안의 분위기 또한 착잡해져만 갔다. 하지만 마지막에 발표를 하게 된 나와 K는 주눅 들지 않았다. 더 이상 나빠질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차례가 돌아오자 M 교수는 나와 K를 호명하고는 강의실 앞문 옆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섰다. 우리는 준비해온 발표를 정해진 시간 안에 실수 없이 마쳤다. M 교수의 피드백을 들으려 문쪽으로 돌아선 순간, 박수소리가 들렸다.


"바로 이거예요! 이것이 내가 여러분 모두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물론 저번 시간, 그 저번 시간에도 거듭해 말했지만 아무래도 나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사람은 이 두 사람뿐인 것 같네요!"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한다. 내가 M 교수를 미워했던 것은 그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1년 만에 그에게 처음으로 칭찬을 받게 돼서야 알아챘다.


M 교수는 내가 졸업할 무렴 안식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대단한 학력과 커리어를 가졌음에도, 교수들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리고 교수직을 맡은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담임교수'라는 성가신 직책을 맡아야만 했었다. 그는 늘 강의시간에 맞춰 뛰어 들어와서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뜨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만큼 강의를 열정적으로 하는 교수를 본 적이 없다. 그의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과거 대학이 <학문의 전당>으로 불렸을 때의 모습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업무와 강의에 바쁜 와중에도 그는 학생들을 위해 기업들과 미술관, 미디어 회사 등에 견학을 기획하고 늘 동행해 주었다. 그날 발표를 마치고 들은 칭찬 이외에 그와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는 재수 없긴 해도 참으로 존경할 만한 선생이었다.  


“Danke, Proffessor M! (M 교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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