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서 맡은 역할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항상 웃는 얼굴의 ‘민정’은 소심하지만 남을 배려하고, 무엇이든 양보합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애인도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처한 친구에게 보내주기로 합니다. 주변에 한 명쯤 서민정 같은 캐릭터가 있을 거예요. ‘난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너네 편한 대로 해’라고 말하는 사람. 혹시 그 사람의 따뜻한 배려를 받고 계신가요? 한 번쯤 그 사람에게도 무언가 보답해주고 싶지만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 사람은 자기 뜻대로 결정하고, 주변 사람들이 맞춰 주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 영 편치 않기 때문이죠.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각기 맡은 캐릭터가 있습니다. 이끌고 결정하는 사람, 결정에 따르는 사람, 늘 도움이 되려고 하는 사람, 아이처럼 요구하고 바라기만 하는 사람 등등.. 당신은 주로 어떤 캐릭터를 맡고 있나요?
역할의 3가지 모습
스티븐 카프먼(Stephen Karpman)의 ‘드라마 삼각형’에서는 관계 속 역할을 3가지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바로 구원자rescuer / 박해자persecutor / 피해자victime 입니다. 명칭이 조금 과하게 느껴지고 내 캐릭터가 아닌 것 같죠? 하지만 일상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모습들입니다.
①구원자
누군가를 잘 도와주는 편인가요? 구원자는 상대에게 도움을 제공할 때 만족감을 느낍니다. '내 존재가 의미 있고, 좋은 사람이 된 느낌'을 가집니다. 구원자는 계속해서 피해자를 발견해 냅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마음이 이끌립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느낄 기회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도움을 주지 않는 상대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언제든지 나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②박해자
누군가의 부족함을 잘 지적하고, 올바른 길을 명령하는 편인가요? 박해자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자신의 신념과 다른 방향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훈계하고 이끌어가려 합니다. 당신이 피해자 역할을 한다면 이들에게 이끌릴 수 있습니다. 왜냐면 박해자는 결정, 선택을 내리는 책임지는 행동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책임지지 않고 싶은 부분,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영역을 박해자가 짊어져 주기 때문입니다. 비록 달갑지 않은 감정을 느끼더라도 이끌리게 될 수 있습니다.
③피해자
나는 왠지 실수가 잦은 것 같고, 결정하기보단 따르는 편인가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들은 주로 피해자 역할을 맡습니다. 피해자는 협조적이고 사람들과 갈등 없이 어울립니다. 그러기 위해 하고픈 것을 참곤 합니다. 대신 그 무엇도 '내 탓'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선택을 양보했으니까요. 구원자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박해자의 손에 이끌려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너 때문이야' 하며 그들을 탓하는 박해자로 변신하기도 하죠.
우리는 세 가지 역할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때로는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박해자가, 혹은 구원자가 되기도 합니다. 회사에서는 피해자의 역할을 맡다가 집에 돌아와서 박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늘 구원자 역할을 하면서 마음속 깊이 피해자가 되고픈 욕구가 꿈틀 거리기도 합니다. 당신의 연애는 어떤 모습인가요?
이번 연애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구원자의 연애하는 모습을 들여다볼까요? 구원자는 상대방을 챙겨주고, 도움을 주고, 보살핍니다. 그것이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사랑을 얻기 위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구원자 역할을 함으로써 상대방이 나를 필요로 하도록, 버리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죠. 구원자에게는 고마움을 잘 표현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가 연애에서 얻는 큰 만족감이기 때문이죠. 만약 구원자와 연애하고 싶다면 조금은 연약함을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무언가를 드러내며 ‘네가 필요해.’라는 메시지를 슬쩍 던져 주세요. 그리고 도움을 받았다면 감사한 마음을 충분히 표현해 주세요.
박해자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는 ‘누가 저런 사람을 만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박해자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단호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면 의지하고 싶고, 저런 사람이 내 편이라면 든든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정답이 없는 수많은 문제들을 맞닥뜨립니다. 퇴사를 해도 될지, 저 지역에 집을 사도 될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누군가 정답을 알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요. 박해자는 자신의 신념에 확신이 있는 사람이며, 그래서 그 신념대로 상대를 이끌어 가려합니다. 그것이 주체성 있는 사람에겐 불쾌한 경험이 되겠지만, 인생에 누군가 대신 올바른 선택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게는 강한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대신 박해자는 그 신념이 틀렸을 때 엄청난 좌절감을 겪게 되고, 틀렸다는 사실을 보통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남 탓을 하며 갑자기 피해자의 역할로 변신하기도 하죠. 당신이 박해자에게 의지하기로 했다면, 그 박해자가 언제든지 당신을 박해자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알아두면 좋겠습니다.
글의 처음에 소개했던 서민정 캐릭터는 피해자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피해자라는 단어는 저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론에서 사용하는 명칭이라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늘 착한 얼굴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피해자는 연애에서도 누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편합니다. 그래서 박해자와 잘 어울리곤 합니다.
피해자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늘 착한 사람이기 위해서 하는 노력들, 자신의 욕구대로 행동하지 않기가 이들의 전략입니다. 그러다 보니 속병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습니다. 당신이 피해자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면 기억하세요. 우리는 살다 보면 남을 가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불편한 일을 만드는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사람들이 반대하는 의견을 내기도 해야 하며, 잘못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마냥 착하고 선하게만 살고 있다면 주변의 누군가 당신의 몫만큼 나쁜 역할을 맡아주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세요.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까?
제가 여기서 ‘이런 사람은 만나지 마세요’라고 말해도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론가 이끌립니다. 보살핌의 욕구는 구원자에게, 의지하고픈 욕구는 박해자에게, 통제하고픈 욕구는 피해자에게 이끌릴 것입니다.
구원자, 박해자, 피해자. 세 가지 캐릭터 모두 각자의 매력과 치명적 단점이 존재하지요. 치명적 단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캐릭터만 고집스럽게 사용하지 않는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만약 어떤 상황에서도 한 캐릭터만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이면의 모습’을 견디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면의 모습’이란, 구원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을, 박해자에게는 ‘나약해지고 자신이 한 말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을, 피해자에게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순간’입니다.
이면의 모습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과 연애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당신이 꺼내 주세요. 구원자에게 당신이 쓸모 없어지는 순간을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박해자에게 실패하고 나약해지는 순간을 허용해 주고, 피해자에게 자립적으로 선택할 기회를 응원해 주세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지만, 부족한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부족함을 사랑해 주는 것만큼은 완벽한 사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