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밭이던 마음에게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려울 수밖에. 가까워지고 싶지만 가까워질 수 없었지. 터질 것 같은 상태를 들키지 않으려면 나를 감추어야 했거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누군가와 친해지기도 어렵잖아. 혼자 상처받고 도망치기 일쑤였어. 그렇게 방어적으로 구느라 상처를 주기도 했지. 악순환이었어.
명상일기로 '반말 울렁증'을 극복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어. 예전엔 나보다 나이가 한 살만 많아도 엄청 어려웠거든. 예의를 지키려 애쓴 나머지, 실수로 반말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혼자서 안절부절못했었지. 그러다 보니 나에게 하는 반말도 달갑지 않았어. 어려 보인다고 반말부터 하는 어른들도 있잖아. 반말이 꼭 무례함을 의미하는 건 아님에도 불편했어.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바탕에 있으면 반말을 해도 충분히 예의를 차릴 수 있잖아. 지금은 반말이 친근하니까 정겹고 좋기도 해. 극복해서 참 다행이지.
또 견딜 수 없었던 건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말이었어. 특히 상대가 없을 때 나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내가 없을 때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겠구나 싶어서 거리를 두게 되었지. 다름이 다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은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기분이 들어서 괴로웠거든. 남 일을 남 일로만 보지 못하고,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는 편이야. 그래, 민감해서 지뢰가 좀 많고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네.
다른 사람의 ‘버럭’도 힘들었어. 어릴 적에 다른 긍정적인 순간도 있었을 텐데, 나를 ‘버럭’ 혼내던 어른들과 그 순간이 잊히지 않더라. 아이들에게 버럭 했던 것이 더 미안하네. 남편 칭요(‘칭찬의 요정’이라는 의미의 별칭)도 버럭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몇 달째 심리학 독서 모임을 다니더니 많이 변했어. 요즘은 버럭 하는 대신 말로 다정하게 표현하더라고.
차라리 표현하면 오해나 갈등을 풀고 더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해. 그러나 말을 꺼내지 못하고 멀어진 사이가 많았어. 살갑던 사람이 어느 순간 냉담한 반응일 때, 눈치껏 알아차려야 했지. 무슨 일이냐고 붙잡고 물어볼 때도 있었지만, 관계는 억지로 붙일 수 있는 게 아니더라. 같은 무리 안에서 온도 차가 다른 걸 느낄 때마다 슬프고 화도 났어. 나 스스로 탓하면서 ‘역시 나와는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구나. 그럼 그렇지.’ 온갖 생각을 하게 돼. 모두와 잘 지내고 싶은 바람이 있었어. 누구든지 모든 이와 똑같은 온도로 지낼 수 없는데도. 다름을 존중하는 사람이 좋다고 하면서, 일상에서 다름을 인정하지는 못했네.
상담 선생님께서 화가 나는 지점에서 나를 돌아보라고 하셨어. 거슬리는 지점을 들여다보겠다고 하니 칭요가 독서 모임에서 배운 5-Why를 알려주었어. 감정이 일어날 때 그걸 활용하면 심리학적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해. “왜?”라고 다섯 번 질문하는 거야. 칭요와 함께 내 마음을 따라가 보았어.
“거슬리는 순간들이 많아.”
“왜 거슬리는가?”
“나와 너무 달라서 거슬려.”
“왜 다른 게 거슬리나?”
“내가 틀리고 남이 맞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내가 맞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
“왜 내가 맞았으면 하는가?”
“맞아야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
“왜 맞아야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 같아서…”
여기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다섯 개의 질문까지 가기도 전에. 칭요도 질문하면서 눈물 흘리겠구나 예상했대. 덕분에 알게 되었어.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그렇게 화가 났구나. 무수한 지뢰를 심어 두고 경계했던 까닭이,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구나.
이유는 어린 시절에 있었어. 집에서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거든. 그 느낌을 스스로 채워가려고 하니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걸 알아. 이제라도, 꼭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되었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억하고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노력하려고.
감추지 않을게. 터져도 괜찮아. ‘펑!’ 터지는 너를 안아주는 ‘품’이 되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