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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사 Oct 22. 2023

무뎌진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일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사라도 꼬처러 다시 도라 오며능 어마나 조케씀미까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화는 덤덤하고 쉬운 문장으로 슬픈 세월을 써 내려간다. 무뎌진 슬픔은 이 한 줄에 담겨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상실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인물들이 지닌 저마다의 상실을 현실적이면서도 유쾌하게 조명한다. 


  예술 영화 외길 인생 프로듀서 찬실은 갑작스러운 감독의 죽음으로, 실직하게 된다. 실직 후, 그녀가 이사 온 곳은 일찍 딸을 잃은 할머니가 사는 집이다. 죽음과 상실이 뒤덮은 자리엔 혼란만 남아있다. 자신이 사랑했던 일이 누군가에겐 생소하고 공감을 받지 못하는 일, 가치 없다고 느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찬실은 응원하지 않는 길을 걸어갈 용기를 잃게 된다. 그런 찬실은 주인집 할머니를 보며 상실을 겪은 삶이 어떤 자세로 삶을 마주하고 나아가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이상하게 할머니들한테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안 까먹고는 못 사는 그런 세월이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러고선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싶어요.

  지난날의 슬픔을 내딛고 오늘에 충실할 수 있는 것. 그런 강함을 지닌 사람들이 어른이 되는 것 같다. 나도 그런 어른들을 몇 보았다.      


  약국에서 일한 지 거의 3년이 되었다. 처방전을 입력하고, 손님에게 약을 건네고, 그 외 잡다하지만 늘 반복되는 일을 계속 이어왔다. 나를 응원하지 못해서 내가 미워지는 시기였다. 나를 벌주는 건가 싶을 정도로 고요하지만 평온하진 않은 날을 보낸다. 반복되는 일상에 감정도 정형화되어 버렸다고 느끼며 지내왔다. 그런데도 가끔 이 고요한 무력감이 무너질 때가 있다. 부끄러워질 때다.     


  무해하게 웃어 보이는 손님 앞에선 나도 모르게 무장 해제된다. 어느 날 단골 할머니 한 분이 내게 단어를 물어보셨다. 이제 막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간판에 있는 글을 다 읽을 줄 아는데 그 단어는 뜻을 모르겠다고 물어온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은 그림을 그리다가 너무 힘이 든다며 약을 지어오신 할머니도 계셨다. 눈도 침침하고 어깨도 손목도, 이미 지난 세월을 열심히 살아내느라 성한 곳이 없지만, 다음 날 선생님께 칭찬받을 생각에 집중해서 그리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처럼 맑은 미소로 배움에 설레는 표정을 봤을 때,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늙기도 전에 이미 낡아버린 마음을 안고 사는 사람을 따끔하게 했다.      


  그리고 무뎌진 슬픔을 목격하게 될 때. 굴곡진 인생의 이야기를 듣게 될 때가 있다. 들려주시는 문장의 마침표마다,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마다 타인에게 말하지 못한 아픔이 얼마나 더 있을까 생각돼서 차마 되묻지 못할 일을 듣기도 한다. 그 시절엔 다 그랬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되는 푸념은 어떻게 그 시간을 버티고 할머니가 되었는지 존경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그 이야기들을 다시 생각하며 깨닫게 된다. 무뎌진 슬픔이 아니라 슬픔을 덮어두는 덮개가 점차 두꺼워진 것이었다. 슬픔 속에서도 내일로 나아가는 것, 내일의 나를 향한 응원이 덮개가 될 수 있다. 응원자가 나일 때 덮개는 가장 두꺼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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