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없는 일기에 실외에서의 만남이 어려울까 소년은 걱정이 되었지만 아침이 되자 불필요한 염려였다. 노인이 제안한 약속 장소가 공원 벤치여 서다.
날씨가 요동치는 것 같지만 그것을 마주하는 마음이 변덕을 부리는 것이다. 비가 무슨 대수라고. 약속은 예언과 닮아서 이를 대하는 두 부류가 존재한다. 가벼이 여기거나 숭고하게 여기거나. 약속을 처음 할 때의 순수를 만료 때까지 유지하는 건 얼마나 커다란 수련이자 시련인가. 소년은 늘 약속을 할 때마다 신중했다. 자신의 일정에 우선순위를 둘 수 없는 약속은 하는 순간 서로에게 독소조항으로 가득 채워진 계약서를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속이야말로 한 인간의 언행일치와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것이 소년의 지론이었다. 약속을 쉽게 다루는 이들을 겪게 되면 상대의 존재 자체보다 상대와의 관계를 더 살피게 되어 그 불편한 마음은 오래 지속되다가 상처가 되곤 했다.
소년은 노인과의 첫 번째 약속된 만남을 하러 가는 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발걸음은 여름 바람처럼 살랑거리듯 가벼웠다. 매주 가는 익숙한 공원길이지만 오늘은 사뭇 달리 보이는 것이 많았다. 보인다는 것보다 눈에 들어와 박히듯 선명하다가 더 정확하다. 길옆 나뭇잎의 모양이 심장 모양인 걸 처음 알았고 나무 간 간격이 일곱 걸음의 일정한 폭임도 이제야 알았다. 몇 번의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엔 이미 노인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