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취중은 옥중이다. 술로 인해 갇힌 상태다. 겉으로는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세상 전부를 안을 듯 호기를 부리지만 조그만 찬찬히 바라다보면 알게 된다. 취중은 그저 내 안에 고스란히 웅크린 마음이 전부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음날 최면에서 풀린 것처럼 현실의 누추함에 차마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워지는가. 다시 돌아온 곳에 내가 여전히 있다. 취중은 현상이다.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맞다. 취중의 말들은 그래서 전면 무효다. 꿈결에 내뱉은 수면 발화를 어찌 고이 공책에 옮겨 길이 남긴단 말인가. 거짓말처럼 진담이 난무하지만 그것들을 하나같이 온전히 복기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다. 어제 하늘에 떠도는 구름의 모양을 오늘 하늘에서 아무리 찾아본들 잠깐 스쳐간 대기일 뿐이다. 취중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놓인 묘한 상황이 된다.
취중에서 가장 바쁜 감각기관은 입이다. 쉴 새 없이 인풋과 아웃풋이 반복된다.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하듯이 입으로 술이 들어가자 어느새 말이 되어 나온다. '그는 말술이다'라는 표현은 주로 술을 18.039리터 마시는(500cc 맥주잔으로 36잔 이상 마시는) 애주가라기보다는 어쩌면 술만 마시면 술보다 말이 더 많은 것을 빗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살면서 가장 말실수를 할 확률이 높은 때도 취중일 것이다. 처음에는 취중잡담으로 시작했다가 취중진담으로 넘어가다 취중악담이 되기도 한다. 이때 취중진담으로 가기 전 술의 양을 조절하며 취중만담으로 흘러가기를 시도한다. 그래야 최종 취중덕담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술의 양이 열쇠가 된다.
어제는 술자리 중에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친구는 취해 있었다. 술자리에서 취중진담을 하는 친구의 전화를 받는 상황이라니! 술집에서의 소음을 뚫고 나오는 나의 목소리만큼 친구의 목소리는 천하를 호령할 듯 크고 박력이 있었다. 지난번 동창회에서의 서운함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때마침 술자리에서 건배사와 함께 잔을 부딪힐 무렵 건너편 자리 너머로 아프리카 조각품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그 친구와 유럽여행을 가던 중 유레일 횡단 열차에서 같은 캐빈에서 긴 여정을 함께 한 벨기에 치과의사가 선물로 준 것과 유사했다. 친구의 기다랗고 모난 오해의 말들을 건성으로 들으며 나는 조각품의 모양과 기억들을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희한하게도 친구는 기분이 풀렸고 나는 눈이 풀린 채 술자리를 이어갔다. 취중이 아니었다면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 취중 상황은 맥락도 없고 온통 청중 없는 무대처럼 잘못된 캐스팅의 연극처럼 주인공들만 있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술을 마시면 만담가가 되는 것이다. 능력이 아니라 치명적 단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평소에 말수가 적은 나로서는 술의 힘을 빌어 이야기를 수도 없이 누에가 실을 뽑듯 만들어 낸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능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그것에만 멈추지 않고 글로서 재미를 본 기억이 왕왕 있는 것도 이 주장에 한몫한다. 술을 마신 후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쓴 글이 그다음 날에 '신이시여! 이 글이 진정 제가 쓴 것이란 말입니까!' 하고 쾌재를 부르기도! 술을 마시고 나면 손끝이 혀끝이 되기도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