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오 eSOOPo Feb 07. 2024

잘 살았구나

0605

철봉이 알파벳 소문자 엠 자 모양으로 서 있다.

왼쪽에는 파이 모양의 등받이 없는 벤치가 있고 오른쪽에는 와이 자 모양을 한 앙상한 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우듬지까지 네 개의 와이 자 가지들이다.

놀이터인데 아이들은 없고 유니폼 조끼를 입은 남자가 어슬렁거리다가 등을 구부린 채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따금 하늘을 보며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주변은 니은 자로 아파트 한 동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다. 현관 유리문은 비밀스럽게 닫혀 있다.

이방인은 허용하지 않고 비밀번호를 모르면 소유와 무관하게 이방인이다. 약속과 기억이 안전이다.

한낮인데 불 켜진 창이 세 군데 보인다. 햇빛만으로도 어두웠던 날들이 있었다. 별빛만으로도 눈부셨던 날들이 있듯이.

방금 놀이터를 가로지르는 길고양이가 명랑하다.

봄소식을 동료들에게 전하고 있는지 분주하다.

자연은 보기에 무료하고 겪기에 바쁘다.

멈춘 듯하나 달리고 죽은 듯하나 약동한다.

별일 없어서 특별하지 않은 날들이 좋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은 얼마나 소중한가.

아무도 날 찾지 않고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날들!

이런 날에는 불쑥 이런 생각이 든다.

잘 살았구나


https://brunch.co.kr/@voice4u/275

괜히 바쁜 날에는 나 자신이 새로 산 전자제품 박스 속 완충제 같다. 쓸모가 한시적이고 처치곤란한 부피만 자랑하는 꼴이 닮았다. 내 주위를 겨우 견디려고 웅크리고 있는 단단한 스치로폼. 이내 부스러지고 부숴진 작은 알갱이들은 스스로 지내지 못해 어딘가에 들러붙는다. 정전기가 유일한 에너지! 털어도 털어도 위치를 바꾸며 매달린다.


https://brunch.co.kr/@voice4u/281

해야할 일과 필요한 일의 경중이 관건이다.

돈받고 하는 강의보다 무료 특강이 더 설레는 건 특권이다.

땅거미가 지지 않은 날이 없듯이 땅을 디디지 않고 보낸 날은 없다.

반복해서 지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새로움을 보지 못한 탓이 더 크다.


낡음의 방치가 피로감을 준다.


피어나야지.

피어나야지.

나를 누르고 있는 흙을 밀어내고 피어나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해보기로 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