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사진은 ‘손에 쥔 시절과 날아가는 공’이다. 사진 산문 8편이 실려있다. 모두 이훤의 작품이다. 이슬아는 시카고에 있는 이훤에게 화상채팅으로 영어수업을 제안한다. 그렇게 알게 된 두 작가는 절친이 된다. 그리고 부부가 된다.
나는 이훤이 찬바람을 쐬며 서 있을 먼 도시의 어느 발코니를 상상한다. 그 역시 마음에 쏙 드는 원고는 아주 드물게 쓸 것이다. 대개의 마감은 시간과 체력의 부족으로 적절히 타협한 채 끝이 날 것이다. 욕심 때문에 작업 진도가 너무 나가지 않을 때면 그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가가 아님을 기억해낸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이 비관적인 자조가 아님을 안다. 그건 그저 계속하고 다시 하겠다는 담담한 의지 같은 것이다.
체력이 부족할 만큼 마감에 쫓겨본 적도 없지만 내용에 공감이 갔다. 누가 정해놓은 마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바쁘다. 혼자만의 계획과 의도가 있다. 언제까지라고 스스로 양과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작업하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주든 아니든 마음속에서 창조 욕구가 흘러넘쳐 쓰고야 마는 시간들이 흘러간다.
등단은 했지만 나 또한 대단한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다. 1등만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1등을 뺀 나머지는 모두 열등한 작가들인가? 1등, 2등을 매길 수 있나? 예술에서도 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상을 주는 심사위원들도 완벽하지 않으니 1,2등의 차이는 엄격한 면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에 규격이 있던가? 바라보는 시각의 균일화는 이루어질 수 있는가?
‘부족하다’ 라고 말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다. 색다른 매력을 뽐내는 자신의 글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자신이 쓴 글은 늘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포기하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다. 그래도 쓰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예술가들은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것들을 창조한다.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이 세상에 없던 건물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린다.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그 부족함을 위해 더 애쓰며 걸어가리라. 계속 하고 싶다는 열망과 의지가 생긴다. 어제와 다른 마음과 자세의 근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팎을 오로지 혼자서 가꿔온 사람도 있을까.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이제는 내 삶이 타인들의 시선에 대롱대롱 매달린다는 것을 어떤 유감도 없이 이해한다. 그러나 누구의 시선에 매달릴지 결정할 권한이 내게 있음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작가는 주변에 사람이 많다. 나이 들면 부모와 가까이 지내는 일이 어려워지는데 심지어 사업도 같이 한다. 같은 건물에서 먹고 자고 일까지 한다. 역할을 엄격하게 정해놓고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하며 필요시에는 도움을 주고받는다. 편집자에게 고마워하고 친밀도 있는 친구들도 많다. 언제든 찾아가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친구를 알고 있다.
그러나 자기주도적인 삶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일침도 가한다. 타인과 알맞게 섞이며 자신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 완벽한 삶을 꿈꿔 보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잘 되지 않는 것 같아 문장을 읽으며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본다.
탐이를 닮아가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을 기억해. 탁월한 점프와 착지, 유려한 꼬리의 움직임, 확실한 요구, 고도의 청력을 가진 세모난 귀들, 하나의 행성처럼 깊은 눈이 두 개나 있었지. 탐이는 더는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아. 나를 귀찮게 할 몸이 사라졌기 때문에.
작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애정을 갖고 있다. ‘가녀장의 시대’라는 자전적 소설을 보면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끝내주는 인생’에서는 기르던 강아지 ‘탐이’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탐이에 대해 묘사한다.
강아지를 멀리하는 나에게도 탐이의 죽음이 안타까울 만큼 애정어린 시선으로 탐이를 그려놓았다. 탐이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것도 같다. 또 모를 것도 같다. 행성처럼 깊은 눈이라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강아지의 눈에서 행성의 깊이를 알아보다니. 강아지와의 교감을 통해 저릿한 순간들을 경험한 작가는 그렇게 강아지와 함께 우주를 본다.
고추밭과 고구마밭을 지나치고, 어느 집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동네를 배회하며 사는 자유로운 개 하나를 지나치고, 딸기의 가장 달콤한 부분만 베어 먹는 아이를 키우는 시인 부부의 마당을 지나치고, 오래된 묘지를 지나치고, 쑥 캐는 할머니를 지나치고, 뜸한 배차 간격의 이층 버스를 지나치고, 아무 건물도 지어지지 않은 벌판을 지나치며 뛴다. 벌판은 젖은 풀냄새를 한가득 머금고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애정이 틈새에 배어나는 문장들이다. 작가의 말에 따라 이제 그 사물이 새롭게 보인다. 그냥 버스가 아니라 뜸한 배차 간격의 이층 버스가 보이고 평범한 벌판이 아니라 아무 건물도 지어지지 않은 벌판으로 보인다. 의미 없는 공터라고 생각되어지던 곳에 눈길이 간다.
작가는 독자가 줄어들 걱정을 하며 대안이 될 만한 직업을 생각해본다. ‘메일 답장 대리인’, ‘마감 관리인’이다. 메일 답장 대리인은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본 뒤 최선의 문장을 준비해 대신 글을 써 준다.
마감 관리인은 말 그대로 게으른 작가들을 픽업 서비스해 앉혀 놓고 글을 쓰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재미있지만 ‘이런 직업이 생겨날까?’ 의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전업 작가로서의 삶이 ‘끝내주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해야 ‘끝내주는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