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을 헤매던 나그네는 축시를 넘겨서야 겨우 허름한 초가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헴, 이리 오너라-
비록 행색은 초라했지만 명색이 양반이었기에 나그네는 함부로 싸리문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 끼익 하며 초가집 문이 열리고 눈처럼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나왔다.
어인 일이신지요.
내 청주에서 올라온 김 씨라 하오. 한양엘 올라가다 산에 들어섰는데 그만 길을 잃어버리게 됐소. 외람되오나 오늘 하룻밤만 신세 질 수 있겠소?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지요.
달빛 아래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하얀 소복처럼 하얗고, 입술은 활활 타는 횃불처럼 붉었다.
초가집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어 나그네와 여인은 한 방에 누웠다.
반시진이 지나도록 나그네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꾸만 여인의 하얀 얼굴과 새빨간 입술이 떠올라 몸만 뒤척거렸다.
잠 못 이루던 나그네가 몸을 여인 쪽으로 돌려 눕자,
여인이 어둠 속에서 몸을 이쪽으로 모로 누워 나그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헉, 깜짝이야.
잠이 오지 않으신가 보군요.
여인이 슬며시 몸을 일으키고는 방구석에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정사각형의 큰 종이판과 쌍륙(주사위)이었다.
오호, 이것은 승경도놀이가 아니오?
쌍륙으로 하는 것은 맞지만 이것은 승경도놀이와 조금 다릅니다. '부루마불'이라 하지요.
과연 나그네가 종이판을 보니 생경한 그림과 글씨들이 적혀있었다.
이렇게 쌍륙을 던져 나온 수만큼 종이판 위의 말을 옮기고, 그 말이 도착한 칸에 있는 마을을 사고 집도 짓는 놀이입니다.
여인은 나그네에게 놀이 방법을 설명하였고, 일각 후에 둘은 초롱불 아래 마주 앉아 부루마블을 하였다.
론돈, 누우욕 등 나그네는 생경한 마을 이름들을 신기해하며 하나씩 사들였고 집을 짓기도 하였다.
파리라, 이 또한 처음 듣는 마을이 구료. 이 뾰족하게 생긴 탑은 무엇이오?
나그네가 종이판에 그려진 그림을 가리켰다.
네, 이것은 에펠탑이라 하옵니다.
에펠탑, 거 참 멋진 탑이로다. 내 이 파리도 사겠소.
탁월한 선택이시옵니다.
나그네는 여인에게 종이돈을 건네고 파리를 샀다.
그때,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벌써 동이 트려나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이 문지방 너머로 새들어오고 있었다.
아이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려. 내 그대 덕에 하룻밤 아주 잘 쉬었다 가오.
종이판 위의 말은 파리에 둔 채 나그네는 여인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꾸려 문을 나섰다.
그러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그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가집은 온데간데없고, 수많은 인파와 거대한 집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그네가 처음 보는 서양 코쟁이들이었고 말 없는 마차가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을 찌를 듯한 뾰족한 탑.
나그네가 방금 전 부루마블 놀이에서 봤던 그림,
에펠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