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酒邪)의 역사

술꾼의 수치

by Ubermensch








우리 집안엔 대대로 술꾼이 많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바다에 놀러 가 뾰족구두에 짧은 치마를 입고 성인인척 술을 사다가 나눠 마셨고, 집안에서도 친척들이 모이면 너도 한잔 해보라며 십 대 소녀인 나에게도 권했다. 수능을 백일 앞두곤 백일주를 마셨고, 대학에 입학하고서는 그야말로 술파티였다. 인문대뿐만 아니라 학교 신문사 자체가 군대식 문화여서, 수습기자들은 먼지 같은 존재로서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양말을 넣은 술도 받아 마셔야 했고, 술집을 빌려 관등성명을 큰소리로 외쳐야 했는데, 나처럼 목소리가 작으면 물에 적신 휴지가 날아왔다. 다행히 그 휴지는 여자라는 이유로 따스한 배려를 받아 얼굴 옆 벽에 날아가 붙었다.

지금은 문화가 많이 바뀌었지만, 내가 입사할 당시인 10년 전 검찰청 역시 군대나 다름없었다. 토하고 와서 술잔을 다시 받는 게 당연했고, 지금 생각하면 비위생적이지만 내 술잔을 들고 선배들이나 상급자를 찾아다니며 술잔을 돌리는 것도 당연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으로 시작하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폭탄사도. 술에 취해 정신이 헤롱헤롱 하지만 곧 그럴싸한 웅변을 해내야 해서 내 머릿속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진부하면 또 욕을 먹어서 참신해야 했으므로. 맥주 500잔에 소맥을 타서 원샷을 안 하면 혼이 났고, 이미 답이 정해진, 너 여자냐 수사관이냐 하는 질문에는 수사관입니다.라고 대답하자마자 그럼 마셔.라는 답이 돌아왔고, 나는 늘 그렇듯 원샷을 했다.


넘어져서 땅을 짚으면 팔이 부러졌을 만큼 마른 체구긴 하지만 술은 꽤 센 편이어서, 20대까지 소주 4병은 거뜬히 마셨다. 내가 지금까지 마신 술의 총량을 따지면 아마 소방차 20대는 거뜬히 넘을 것 같다. 어쨌든 이 유구한 주취의 나날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주사는 내 삶에 다채로운 흑역사를 남기고 말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모든 스펙트럼의 주사를 섭렵했다.


간이 날것이던 시절엔 취한 티가 전혀 안나는 주사. 조금 웃음이 많아지고 밝아지는 주사. 거칠고 박력 있어지는 주사. 울음이 터지는 주사. 평소라면 절대 안 할 감정 표현을 남발하는 주사. 폭력을 휘두르는 주사. 식탁 위에, 사람 무릎에, 손에, 심지어 얼굴에까지 토한 적도 있다. 여기서 사람이란 나 말고 타인을 말한다. 술에 취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진상짓을 다 해서, 나중엔 취해서 저지른 웬만한 일엔 부끄럽지도 않은 경지에 이르게 됐다.


대학시절 내가 자주 청강하던 철학과 강의가 있었다. 나는 비록 국문과지만 철학과 교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되면서 어느 날 강의 중 즉흥적으로 다 함께 술을 마시러 가게 됐다. 그때가 오후 2시던가 4시던가 했는데, 삶과 사랑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자리는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나를 제외하고 교수님 포함 모두 남자였고 나만 빼고 다들 담배를 피우길래, 나도 끼워달라고 담배를 주면 안 되냐고 했다. 아무도 안주길래 혼자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그날 처음 안면 튼 남자애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혼냈다.


당시 장기 연애를 마치고 갓 헤어진 상황에서, 나는 늘 쌍꺼풀이 진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만 사귀는데, 그 애도 그랬다. 나한테 담배에 손댈 생각도 말라며 뭐라 뭐라 잔소리를 하길래 듣기 싫어서 입을 막아버렸다. 내 입으로.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난 수줍음도 많고 스킨십을 썩 좋아하거나 적극적인 편도 아니다. 그 애는 행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날 처음 말해 본 여자애의 박력에 넘어가 고시도 망치고 인생도 망쳤다. 남자친구를 시켜주기에는 키가 3센티정도 부족해서, 마음을 받아주진 않았다. 걔는 나를 요망이라고 불렀다.


수습 때는 매일 압수물 수레를 끌며 소처럼 일하고 깨지고 울고불고하느라 안 그래도 힘든데, 저녁엔 매일 술자리가 있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꼭두새벽에 출근을 하고, 그 술이 깰 무렵엔 또 술을 마시러 가야 했다. 선배가 술자리에서 혼을 내길래, 취해서 등장한 제3의 자아가 대선배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다음날 엄청 혼나서 눈물을 쏙 뺐다. 내가 울었으니 달래준다는 핑계로 그날 저녁에도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거기서 내 가운데 손가락이 또 나와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또 혼나고. 또 술자리가 생기고.


후배가 생기고 나서는, 원래 첫 후배가 생겼을 때가 제일 못마땅한 점이 많은데, 나는 입사를 일찍 해서 후배가 연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평소 불만사항을 뭐라 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술에 취하자 폭력성으로 발현됐다. 팔뚝도 깨물고 뺨도 때렸다. 나중엔 후배를 넘어 선배 팔뚝도 물어뜯었다. 나중에 우리 부서 회식 다음날엔 서로 물린 상처를 보여주는 게 유행이 되기도 했다. 내가 그랬을 리 없다고 막 부인을 했는데, 과학수사를 해보자며 선배 하나가 휴지를 가져와 물어보라고 하더니, 상처와 대조해보고서는 치열 구조가 일치한다고 했다. 나도 수긍하고 사죄했다.


막내시절부터 나를 지켜본 선배는, 내가 만약 여리여리하고 예쁘장한 여자 수사관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징역을 살고 있을 거라고 했다. 나에게 피해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냥 넘어가주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각양각색의 주사를 부리고 다녔음에도 불고하고. 술자리에서 나는 슈퍼스타 연예인이어서, 저녁은 2주간 예약이 꽉 차있을 만큼 항상 초청이 끊이질 않았는데, 시간이 흘러 그 술 사주던 선배들이 가정을 꾸리고 애들이 자라나고, 내게 선배보다 후배들이 더 많아지는 입장이 되자 자연스레 술자리도 줄었다.


그 이후에는 주말에 고소한 정수리 냄새가 나는 남자친구와 대부분 마셨고, 주중에는 혼자 마시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주사의 대상은 남자친구가 독박을 썼고, 혼자 마실 때는 선량한 선배와 딱한 후배에게 카톡을 보내는 비대면 방식으로 전환됐다. 다음날 일어나면 그 대화창을 올려볼 수 없었다. 수년간 그 지긋지긋했을 술냄새 풍기는 카톡을 받아준 그 두 사람에게 정말 송구스럽다. 다행히 몇 달 전 챗 GPT의 존재를 알게 돼서, 내 주사는 더 이상 사람을 향하지 않는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간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적어도 내 생활 반경 사람들에 한해선 확실하다. 술은 몸에도 해롭고, 정신에도 해롭고, 나 말고 타인에게도 해롭다. 그러니까 술을 절대 과하게 마시면 안 된다. 나는 오늘부터 술을 끊기로 결심한다. 정말이다.



keyword
Ubermensch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1,171
이전 03화나의 원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