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하는 날은 꼭 채혈을 했다. 굶고 가면 바늘이 더 아프게 느껴져서 네 번째 항암부터는 뭐라도 먹고 갔다. 항암 외에도 중간 검사 때마다 신체 컨디션 체크를 위해 채혈을 했다. 피로 할수 있는 검사가 생각보다 많았다. 의사는 문진때마다 내 얼굴이나 목소리로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모니터의 수치로 상태를 점검했다. 가령 부비동염으로 항암 중간부터 고생했었는데 염증수치가 올라갔다면서 항생제를 처방해주는 식이었다.
나는 사람을 대할 때, 목소리와 얼굴과 분위기를 도합한 ‘눈치’로 대했다. 센스있다는 소리도 가끔 들었고, 눈치보지 말라는 소리도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목소리만으로도 그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진단했다고 착각했는데, PMS로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동료의 기분을 살펴 기민하게 움직이거나 상사가 거래처에 전화 통화가 제대로 되지 않을 때도 알아차렸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것들 부정확한 정보들을 살피기 시작했을까. 눈치가 빠르다고 스스로 자부하기까지 하면서.
처음부터 내가 눈치가 빨랐던 것은 아니다. 나는 별명이 거북이였다. 그날배울 참고서를 사물함에 두고 다니는 아이들과는 다르게 나는 초등학교 때 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 까지 가방에 넣고 다녔다. 아이들은 참고서의 챕터 별로 책 등의 제본을 찢어 다닐 때도 나는 가방에 다 넣고 다녔다. 내 가방에는 없는 게 없어서 보부상이라는 별명도 붙었는데 딱풀도 들어있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고 술자리에서 과대가 말했다. 눈치 좀 챙기라고. 내가 어떤 말이건 상대방의 기분이나 분위기를 살피지 않고 말한다고 했다. 직장에서도 같은 부서 상사를 두고 다른 팀 팀장과 대리와 더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눈치 좀 챙기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수치화 되는 것이 아니라 미묘한 차이, 한끗 차이였다. 나는 채혈하며 그런 것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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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시간에 번호는 늘 1300번 대였다. 언제부터 0000번으로 리셋되어 나까지 1300명인가 궁금했다. 피를 뽑고 지혈을 하며 대기 인원을 헤아려 보았다. 분당 20명 정도니까 적어도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전에는 채혈실이 북적인다는 계산이 나왔다. 아침 8시. 한 시간만에 1300명이 피를 뽑는다. 아픈 사람이 그만큼이나 됐다. 내 또래는 적었고 대부분 60-70대가 많았다. 아파 보인다기보다 지쳐보였다. 둘 다이겠지만. 생로병사라는 말이 맞았다. 채혈을 이번주에는 수술을 앞두고 있어서 검사가 네 개나 있었다. 피도 네 번이나 뽑았다. 거기에다가 조형제와 방사선약물까지 주사가 투여됐으니, 양손 등과 팔꿈치 안쪽에 바늘자국과 멍든 자국이 보였다. 피를 많이 뽑은 혈관은 딱딱해지거나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채혈 담당자나 간호사들은 혈관을 잘 보기 위해 손등을 때리거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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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기 전에는 감기나, 치통을 걱정했는데, 아프고 보니 혈관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약들이 혈관을 통해서 몸으로 들어가는 길이니까. 근육이 튼튼해지는 것은 알았는데 혈관이 튼튼해지는 방법은 뭘까 하고 생각했다. 어쨌든 운동이다.
혈액 샘플들에는 환자 이름과 등록번호가 붙어 긴 레일을 따라 지나갔다. 나는 피를 뽑을 때 세로로 길게 만들어진 투명관으로 레일을 따라 빨려가는 누군가의 피를 보고 있었다. 피를 뽑는 걸 직접 보는 건 늘 무서웠기 때문에 복도에 걸린 그림을 응시하거나 되도록 보지 않았다.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있으면 공포로 얼굴이 하얗게 질릴 것 같았다. 어떠한 광경들은 나를 질리게 했고 나는 내가 고개를 돌리고 피를 뽑는 걸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의외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직접 보려고 생각했는데 칸막이 사이로 비친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충분히 무서웠고 그 다음 부터는 엄두를 못냈다. 스릴러는 잘 봤는데 그것이 픽션이기 때문이고 거기에는 통증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채혈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눈치와 아픈 사람들과 통증이 없는 공포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