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은 각자가 잘 하는 천재성이 있다. 우리의 천재성을 사회가 덮고, 직장에서는 상사가 덮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덮어 버린다. 이어령 선생님 말씀을 빌려 오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 났는데 다 같이 한 방향으로 뛰면 1등 부터 꼴등까지 나열할 수 있지만 자신만의 방향으로 뛰면 모두가 1등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알았던 적이 있다. 바이올린을 잘 했고, 노래를 잘 불렀으며, 시도 잘 지었다. 외국어도, 수학도 잘 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성숙할 수록 잘 못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까봐 스스로를 억누르며10년을 살았다. 잘난 사람의 싹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싹둑 잘라 버리는 사회 때문이라고 탓해 본다. 나는 세상에 피어나지 않았다. 아니, 피고 싶지 않았다. 철이 녹이 스는 것처럼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되었다. 늙는 것이 두려웠고 스스로 누구인지 모르는 한 사람이 되었을 땐, 절망이 찾아왔다. 동기부여 없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나에겐 지옥 같았지만 사회에 모나지 않게, 엄마의 자랑이고 싶어 자발적으로 지옥에서 살았던 것 같다. 자율 반사 신경 처럼, 내 몸은 지옥같은 시간 속에서도 살려고 버텼다. 죽지 못해 울다 잠이 들거나 미친듯이 런닝머신을 뛰었다.
삶을 견디는 여기가 지옥 같았다. 웃음을 잃어버린 얼굴에는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사는 것도 늙는 것도 죽는 것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과 늙음 중에 뭐가 더 무서울까 고민했었다. 물음을 던지며 시간을 보내다가 이런 결론에 다다랐다. 죽음과 늙음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우리라. 나의 죽음과 늙음 또한 별 일 없는 이상 자연스러울 거라 생각하며 안도 했었다. 그리고 삶의 무상을 깨달으며 삶의 꽃을 피우고 싶어 졌다. 삶을 꽃에 비유해 보자. 꽃이 피면, 아름답고 향기가 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진다. 너무 예뻐서 꽃이 핀 그 순간을, 우리는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한다. 영원하다면 아름다움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꽃이 지는 것이 아니라 질 것이 두려워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다. 죽는 것이 두려워 삶을 즐기지 못한다면 두려움에 피지 못하는 꽃과 같다. 우리 삶은 꽃처럼 피고 질 수 있어야 한다. 꽃이 피어 영원하기를 바란다면 삶은 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잘 살아내는 것이 꽃을 피고 지게 하는 것인데 늙음을 부정하고 두려워 한다면 그 감정을 잡고 있느라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꽃을 피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삶은 살아 내는 것에 의미가 있다: 꽃처럼 피어나야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아니 살아 내면서 겪는 희,노,애,락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 나를 당당히 드러내자. 두려워 피지 못하는 것이 피고 지는 것보다 더 괴로울 테니까. 우리는 영원할 수 없다.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가 다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