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기뻐하면 집안이 평온하다.
이틀 전이었다.
“오빠 나 머리 잘라도 될까?”
“응? 얼마큼 자르게? 그걸 뭘 물어봐.
여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음.......”
“숏컷하려고. 아예 확~”
“에엥? 그건 좀.......”
오늘 아침 출근 전이었다.
회사로 가져가 마실 커피를 내리며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그런데, 애초에 머리는 왜 자르고 싶었던 거야?”
“응? 음.......”
“세상사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머리카락이라도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아내는 말을 이어갔다.
올해 아내 나이 서른네 살.
엄마가, 그러니까 장모님이 자기 나이일 때
머리를 숏컷으로 잘랐다고 했다.
아마 25년 전쯤, 1990년대 중반 즈음일 거다.
아내의 기억으로,
그때 엄마는 기껏 머리카락 하나 자르는 일인데
안절부절못하며 아빠에게 절절매고 계셨다고 했다.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의 정점에서 살아온 장인어른을
탓하면서 한 이야기는 아니다.
여자는 긴 머리를 해야 예쁘다고
무릇 남자들이 생각하던 시대였으니까.
2020년을 살아가는 내게도 그런 여파가 남아있는 것일까.
평소 파마를 한다고 해도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고,
이번 숏컷은 더더욱 어색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루 전,
아내가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보고 있었다.
내가 슬쩍 다가가 뭘 보고 있나 지켜보니
‘여자 숏컷’이란 키워드로 폭풍 검색을 하고 있었다.
“뭐야. 진짜 하려고? 에이 설마.......”
“왜? 하면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좀.......”
몇 주 전 회사 후배가 숏컷을 하고 왔다.
그때 나는 그녀에게 멋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감탄해주었다.
큰 맘먹고 머리를 싹둑 자른 후배에게
립서비스를 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며 칭찬해주었다.
그런 내가 왜 유독 아내에게는 보수적이 되었던 걸까.
아나운서란 내 직업 또한
바뀌는 시대의 모습과 최신 트렌드에 극도로 민감한데,
또 시대가 어느 때인데,
결혼했다고 아내가 내 소유물도 아닌데 말이다.
비단 이게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다.
몇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는
남성과 여성의 틀에 박힌 역할, 모습, 행동에
나도 모르는 사이 지배당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직장에선 개방적, 사회적 인간의 모습을 마음껏 보여주고
집에 와서는 보수적 인간이 돼버리는 이 이중성을
어떻게 없애버려야 하나.
갑자기 2011년 미쓰에이의 히트곡
‘Bad Girl Good Girl’의 가사가 떠올랐다.
“겉으론 bad girl 속으론 good girl,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겉모습만 보면서
한심한 여자로 보는 너의 시선이 난 너무나 웃겨
춤출 땐 bad girl 사랑은 good girl
춤추는 내 모습을 볼 때는 넋을 놓고 보고서는
끝나니 손가락질하는 그 위선이 난 너무나 웃겨. “
“오 마이갓. 설마 이게 내 얘기였던 거야?”
※ 숏컷[X] 쇼트커트[O] ※
아내가 미용실로 떠나기 전,
딸아이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오빠, 당분간 이 긴 머리는 못 볼 거야. 인사해.”
“하연아 엄마 변신해서 올게. 남자처럼.......”
아내의 농담에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받아쳤다.
“응. 뭐 원래 아들 하나 딸 하나랑 살고 있었는데 뭐.”
아직도 떨떠름한 나는 “아들 하나”라고 하며 아내를,
“딸 하나”라고 할 땐 하연이를 가리키며 인사했다.
참으로 쿨하지 못하게.
찌질이 궁상이었다.
“띠띠띠띡. 띠리링~. 촤아악.”
도어록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딸아이가 먼저 뛰쳐나갔다.
아내가 그 어느 때보다 격앙된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짜잔~ 하연아 엄마 왔어!”
나는 궁금한 마음 반,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맘 반으로,
정면으로 아내를 응시하지 못했던 시선을
아내의 머리로 고정시켰다.
그러자,
그랬는데.......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와......”
“예쁘네....... 멋있다. 여보.”
예쁘다는 말을 먼저 하긴 했지만,
그 보다는 사실 멋있었다.
멋지다는 취지 말을 아내에게 연거푸 쏟아냈다.
“대박...... 장난 아닌데?”
“멋지다. 끝내주네”
“우와. 이건 정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아내는
내가 최근 며칠 동안 해댄 말들이 틀렸다는 걸 확신하며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여보! 어때! 다른 여자 같아? 헤헤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기뻐하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본 것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을 굳이 왜 나의 잣대로
만류 아닌 만류를 하려 했을까.
사실 내 허락 따위는 필요 없었다.
‘허락’이라는 단어도 이상하다.
‘의견 개진’ 정도가 적절하겠다.
아내가 기뻐하니 집은 더 평화로워졌다.
아내의 자존감 상승은 내게도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소식이었다.
결혼을 했든 아이가 있든 그건 상관없는 일이다.
하고 싶은 건 그냥 하면서 사는 것이다.
내가 처해있는 환경과 주변의 인식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엄두를 내지 못하던 일을 해보며 자존감을 드높이는 건
건조한 우리 삶에 촉촉함을 불어넣어주는 일이다.
진짜 별 거 아닌 머리카락 자르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우리 삶이 전 보다 조금은 더 빛나는 것 같았다.
나도 더 멋진 남편이 된 거 같은 기분이다.
나의 판타지 중 하나도 해결되었다.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한결(공유)이 은찬(윤은혜)의 정수리 부분 머리카락을
손으로 풀어헤치듯 만져주는 바로 그 장면,
나도 드디어 해보았다.
드라마 속 공유로 잠시 빙의해 머리를 그렇게 만지고는
옆에서 엄마의 짧은 머리에 어색해하는 딸아이의 머리도
그렇게 한번 비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연이도 이렇게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면서 살아야 돼! 하연이 엄마처럼 말이야!
오늘 저녁 아내가 퇴근하면
회사에서 들은 온갖 이야기를 얼마나 신나게 쏟아낼까.
아내의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얼마나 자신감 있고,
얼마나 멋진 모습일지 말이다.
※ 외래어 표기법 ※
컷 : 영상과 관련되어,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에서도 쓰임
커트 : 머리 자르는 일, 전체에서 일부를 잘라내는 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