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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한 골방 Feb 02. 2024

부모가 적당히 좋아야 아이가 독립할 수 있어요

마가렛 말러의 분리개별화 과정

  우리는 갓난아기 시절에 부모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님과의 분리를 시작하고, 이후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한 명의 개인이 됩니다. 상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좀 더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상당히 놀라운 일이기도 해요. 아이가 아닌 어른이라면, 이처럼 의존적인 삶을 포기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쉬울까요?


  바로 이전의 글인 '아이들은 왜 애착인형에 집착할까'에서는 생후 12개월까지의 아이들이 어머니와 분리되는 과정을 소개드렸죠. 이번에는 출생 후 3년의 시간 동안 아이가 의존에서 독립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여드리려고 해요. 이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마거릿 말러(Margaret Mahler)분리개별화과정(separation-individuation process)입니다.


  이름에서 추측해 볼 수도 있듯이, 분리개별화 과정에서는 아이가 부모님으로부터 분리되고 개별화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마거릿 말러는 이 과정을 총 6개의 시기로 나누어서 설명했어요.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정상 자폐기 : 출생 후 ~ 생후 1개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이 위치한 시기입니다. 이때의 아이들은 세상에 나온 지도 얼마 안 됐고, 인지능력도 제대로 발달되지 못한 상태예요. 그래서 아이는 자신 외의 존재들을 알아챌 수도 없고 관심도 없어합니다. 여기서 엄마도 예외가 될 수 없어요. 이 시기의 아이는 엄마를 포함해서 타인과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비록 정상적인 과정이긴 하지만,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관심 없어하는 모습이 자폐적 특성과 비슷하기에 이 시기는 정상 자폐기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참고로 정상 자폐기는 나중에 분리개별화 이론에서 제외되기도 했었고, 또한 다른 시기에 비해서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은 시기이기도 해서 가벼이 읽어주셔도 될 것 같아요.


<2. 공생기 : 생후 1개월 ~ 생후 5개월>

  인생 1개월 차인 아이들은 자신 외의 존재들에 대해서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요.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배고플 때 기꺼이 가슴을 물려주는 엄마를 보면서 웃기도 합니다. 누군지도 모르지만 엄마로부터 행복한 감정이 오는 것도 사실이기에, 의도치는 않았지만 타인에게도 웃음과 같은 감정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해요.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을 해야만 하는 상태고, 엄마는 비정상적으로 아이에게 몰두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비정상적이라고 표현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갓난아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아이에서 잠시라도 한눈을 떼면 혹시나 어떻게 될까 걱정스러운 것이 당연하니까요. 아이와 엄마의 사연들이 맞물려서, 이 시기의 아이와 엄마는 마치 공생하는 관계처럼 보이는 시기입니다.


공생기는 엄마와 아이가 서로 한몸이 되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마치 아이와 엄마가 공생하며 지내는 듯한  시기입니다.


<3. 분화 분기 : 생후 5개월 ~ 생후 9개월>

  아이가 생후 5개월이 되면 일정 수준으로 감각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아이는 자신 외에 존재하는 주변 사물에도 관심을 가져요. 이제 아이는 주변 환경을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드디어 낯가림을 보이기 시작해요. 낯가림은 얼핏 보면 아이가 사람들을 불편해하는 것 같아 걱정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낯가림은 엄마와 낯선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는 신호라서 낯가림이 전혀 없는 것도 걱정되는 일이기도 해요. 적당한 낯가림은 오히려 아이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좋은 신호이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4. 실습 분기 : 생후 9개월 ~ 생후 16개월>

  이 시기의 아이들은 호기심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립니다. 드디어 기어 다니기와 걸어 다니기를 할 수 있게 되거든요. 이제까지는 자신의 의지로 이동할 수 없었기에 엄마와 물리적으로 분리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이는 엄마로부터 떨어진 상태로 스스로 이것저것 해볼 수 있게 됐어요. 신기한 게 있으면 만져보고 먹어보고 맡아보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인생 처음으로 경험하는 새로운 것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시기라서, 이때의 아이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뿌듯해하며 즐거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자기애가 최고조로 도달해 있는 시기'라고도 했어요.

  하지만 꼭 즐거운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이 시기의 아이에게 엄마와의 분리는 신나는 일이자 동시에 불안한 일입니다. 엄마로부터 떨어져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은 분명 즐겁긴 해도, 이제까지 항상 함께해 왔던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것은 불안하게 느껴지거든요. 아이는 의존에서 오는 사랑과 독립에서 오는 즐거움 중에서 갈등합니다. 그 결과 아이는 엄마 품에서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가 바깥세상이 궁금해지면 여행을 떠나고, 여행을 떠나 있다가 사랑이 고파지면 엄마 품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해요. 이 과정을 재급유(refueling)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자동차가 여행을 하다가 연료가 떨어지면 주유소를 들러서 기름을 채우고, 연료가 충분해진 자동차는 다시 주유소를 떠나는 과정과 비슷하거든요. 실습 분기라는 표현처럼, 이 시기의 아이들은 독립을 실습해 가며 점차 엄마와 떨어질 수 있는 거리를 늘려갑니다.


자동차는 연료가 떨어지면 주유소를 방문해서 연료를 충전하고, 연료가 충분해진 자동차는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주유소는 엄마, 아이는 자동차, 연료는 사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5. 화해접근 분기 : 생후 16개월 ~ 생후 24개월>

  이제 아이는 엄마와의 분리가 익숙해져 갑니다. 아이는 점차 행동반경이 넓어져가고 그만큼 엄마의 제지를 받는 일도 많아져요. 아이는 자율성을 가지고 세상 탐험을 하고 싶어 하는 반면에, 엄마는 아이가 지나친 행동을 할까 노심초사하며 아이의 자율성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때는 아이의 자율성과 엄마의 통제가 많이 충돌할 수도 있는 시기라고 해요. 이 시기를 우리는 미운 세 살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terrible two(끔찍한 두 살)라고도 합니다. 이쯤 되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두세 살의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의 고통과 고민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아이가 나이를 먹으며 점점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서 상당히 힘들 수도 있겠지만, 건강한 어머니라면 아이가 하지 않아야 할 행동들은 막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시기상 사고방식이 매우 단순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이기에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엄마를 매우 나쁜 엄마라고 느끼고, 반대로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면 매우 좋은 엄마라고 느낍니다. 생후 16개월에서 24개월의 아이도 아직은 많이 어릴 때라서 인지발달이 그렇게 많이 진행되지는 못했겠죠. 우리 엄마가 때에 따라서 좋은 엄마가 되기도 하고 나쁜 엄마가 되기도 한다는 것은 이 시기의 아이에겐 지나치게 어려운 개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늘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거나, 좋은 엄마가 되기를 포기하고 늘 나쁜 엄마가 되어버린다면 아이는 부모로부터 정상적으로 독립해갈 수 없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깨달을 때까지 아이에게 안 되는 것들을 일관되고 따뜻하게 알려줘야만 해요. 아이의 건강한 독립을 위해서 엄마의 꾸준한 공감과 인내가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6. 대상항상성이 형성되는 시기 : 생후 24개월 ~ 생후 36개월>

  이제까지 엄마의 따뜻하고 일관된 통제를 겪으며 아이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엄마도 사실은 나를 사랑하는 엄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 깨달음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제 아이는 매우 좋은 엄마와 매우 나쁜 엄마가 사실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더 나아가서 우리 엄마는 '적당히 좋은 엄마'라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이제 적당히 좋은 엄마의 내면화라고 하는 과정 이루어집니다. 아이는 적당히 좋은 엄마가 한결같이 줬던 따뜻한 추억들을 내면에 간직하고, 대상항상성(object constancy)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대상항상성이란 '상대방이 나쁘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상대방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상항상성을 얻기 위해서현재는 나쁘게 느껴지는 대상이라도, 과거에 자신에게 좋은 추억을 줬다는 사실을 기억할 있어야 합니다. 아이에게 적당히 좋은 엄마가 줬던 따스한 추억처럼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시를 들어볼게요. 적당히 좋은 엄마에게 따뜻한 관심을 받아왔던 아이가 엄마에게 혼나는 순간을 살펴보려 합니다. 아이 입장에서 현재 자신에게 화를 내는 엄마가 그 순간에는 매우 나쁜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아이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불안감을 달래줄 수 있어요.

지금 나를 혼내고 있는 엄마가 매우 나쁜 엄마 같아서 불안해.
하지만 이전의 엄마는 늘 나를 따뜻하게 사랑해 줬어.
그러니까 나도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덜 불안해할 거야.


엄마가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혼내고 있는 상황에도, 대상항상성을 갖춘 아이라면 엄마와 함께했던 따뜻한 추억을 가지고서 크게 불안해하지 않고 계속 엄마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는 엄마와 함께했던 따뜻한 추억으로 엄마가 자신을 혼내도 덜 불안해할 수 있게 됐죠. 이런 아이가 바로 대상항상성을 획득한 아이고,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잘 달랠 수 있는 아이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다른 대인관계에서 불안을 느껴도 비교적 쉽게 스스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참고로 대상항상성은 대상영속성(object permanence)과는 다른 개념이에요. 최근에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이 둘을 혼용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이서 여러분께서도 헷갈리지 않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상영속성은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고 믿는 능력이에요.


  참고로 적당히 좋은 엄마는 도널드 위니캇이 제시했던 개념이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 당히 좋은 엄마를 경험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나중에 아이가 커서 대인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돕거든요. 매우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엄마를 경험한 사람은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매우 좋기만 한 엄마를 경험한 사람은 의존적일 가능성이 높고, 다른 사람들을 겪을 때 큰 실망들을 할 가능성도 커요. 현실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은 엄마만큼 자신에게 잘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매우 나쁘기만 한 엄마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가 바닥이라서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할 때가 많습니다. 현실에서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있어도 어색해하고, 결국 타인의 호의에서 나온 행동들조차도 긍정적으로 느끼지 못해요.


   반면에 적당히 좋은 엄마를 경험했던 사람은 대인관계에 대해서 적당히 좋은 기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나치게 좌절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철벽을 치지도 않으면서 남들보다 대인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어요. 이러나저러나 적당히 좋은 엄마는 나중에 있을 아이의 대인관계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어머니인 셈이에요.




  오늘 설명드린 분리개별화 과정에서는, 건강한 정신적 독립을 위해서는 성장과정에서 적당히 좋은 어머니를 경험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만약에 자신이 건강한 독립을 이루신 것인지 고민되신다면,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의 인생에서는 적당히 좋은 엄마, 혹은 적당히 좋은 사람이 있으셨나요?


  만약에 적당히 좋은 사람의 부재로 인해서 아쉬움을 느끼셨다면, 지금의 관계들을 한번 살펴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느 누구도 완전히 나쁘기만 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완전히 좋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대인관계에 대한 기대에 따라서 같은 사람도 달리 보일 수도 있어요. 관계에 대한 기대를 낮추면 나쁘기만 했던 사람도 좋아 보일 수 있고, 반대로 관계에 대한 기대를 높이면 좋은 사람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적당히 좋은 사람이 인생에서 생기고, 그 사람과의 좋은 추억들을 마음에 보관할 수 있다면,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 한 발짝 나아가실 수 있으실 거에요. 여러분의 진정한 독립을 응원하겠습니다.




건강한 독립은,
적당히 따스했던
의존의 기억에서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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