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동안 쉰 책걸상을 닦으며

개학 전 잠시 출근

by 물지우개

마지막 평일이다. 다음 평일이 오면 나는 6시 30분에 일어나 아침밥을 안치고 전날 우유를 부어 둔 요구르트를 떠먹는다. 7시에 아이들이 거짓말처럼 일어나 밥을 먹으면 나는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고른다. 8시가 되면 약간 하이톤으로 “얘들아 학교 잘 다녀와!” 라며 나에게 파이팅하듯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시동을 걸자마자 늘 듣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켜고 양쪽으로 뻗은 측백나무 길을 달린다. 반듯한 나무들은 나를 보고 평소처럼 말하겠지. “오늘도 나처럼 살다와.”




휴가라고는 일 년에 길어야 일주일인 직장인이 가장 부러워하는 방학을 40일 넘게 보냈다. 인정한다. 그 어떤 단점도 다 덮어버리는 이 업의 장점. 어느 교사에게는 이 점이 맞지 않는 적성과 낮은 연봉도 잊게 한다는. 요즘 교대 커트라인이나 초임 교사를 보면 이 업은 나에게 과분하다. 출산율이 바닥을 치고 학생 수는 점점 줄어 폐교가 간당간당한 학교가 느는 상황을 보면 철밥통 공무원인 내 밥줄도 간당간당하다. ‘그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는 관념을 뒤집은 사례는 차고 넘치니 대대적인 교사 구조조정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나마 있는 어린이는 귀함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인데 국민이 느끼는 교사의 서비스가 불만족이라면 국가는 세금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동감한다. 서서히 잘릴 위기를 느끼며 내 서비스를 반성한다.

말하기 머쓱하지만 방학의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개학을 앞둔 내 심정을 구태여 토로하자면, 공허함, 허무함, 허탈감의 빌 ‘虛’다. 연예인의 심경이랄까? 화려한 갈채를 받고 무대를 내려온 연극배우가 텅 빈 집에 서 혼자 컵라면을 먹는 기분쯤? 빨아들이는 면에서 무대의 조명을 느끼고 들이키는 국물에서 관객의 환호가 들리는 기분. 지나간 시간과 같이 사라져 버려 내 기억에만 존재하는. 침 튀기며 다시 설명해봤자 나만 아는. 공유할 수 없고, 보관할 수 없고, 오지 않는 기억이다. 이어지는 지루함, 외로움, 불안함, 우울감이다. 이 어두운 감정도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싼다면 할 말 없지만 개학을 앞둔 나는 증발한 시간으로 말라붙은 빈 그릇만 쳐다본다. 밥그릇이라 던지지도 못한다. 앞으로 수업과 업무와 스트레스와 민원과 집안일로 꾹꾹 눌러 담아야 한다. 먹어야 살지만, 살기 위해 먹는 밥은 맛이 없다.


머리카락을 잘랐다. 진작 자르고 싶었는데 서늘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고온 다습에는 머리가 좀 아파도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는 게 낫기 때문이다. 여름을 보낸 머리카락은 피부만큼 늙었다. 푸석하고 거칠다. 지들끼리 비비면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가 난다. 예전에 엄마가 그랬다. “피부만 늙는 게 아니야. 목소리도 늙고, 머리카락도 늙어. 손톱, 발톱도 늙고 오감도 늙어.” 아침저녁으로 부는 서늘한 바람은 등교뿐만 아니라 늙은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재촉한다. 방학 동안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바싹 늙어버린 머리카락을 과감히 잘랐다. 머리를 자르는 미용사는 말했다.


“여기는 싸게 머리 깎아 주는 데라 드라이도 안 해주고 샴푸도 안 해주는데 왜 안 해주냐고 따지는 손님이 가끔 있어요. 이 컷 가격이 20년 전 가격이거든요(여성컷은 만원, 남성 컷은 팔천 원이었다). 더 나은 서비스를 원하면 비싼 미용실에 가라고 말하면 어차피 다 비슷하게 머리 자르면서 집집마다 가격이 다르다며 또 불평한다니까요. 그런 손님은 양심에 찔려도 대충 잘라주고 보내요. 다시 오지 말라고.”


서비스 공급자는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가격만큼 제공하는데 수요자의 만족감은 측정하기가 애매하다. 개인마다 기분마다 상황마다 달라지니까. 가격만큼이면 다행, 가격보다 덜하면 화나고, 더하면 흐뭇한. 이 이야기를 들으며 교사로서 내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생각한다. 어렵다. 서비스의 대가를 수요자가 직접 치르지 않고, 스물두 명에게 동시에 제공한다. 어린이들의 만족감을 매일, 매 시간 확인할 수 없고, 확인한 들 내 서비스의 질을 매일, 매 시간 바꾸기 버겁다. 동료들 간의 연대나 소통은 아직 갈 길이 멀고, 스물두 명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학부모까지 요구 사항이 모두 다르다. 방학을 기다리는 힘으로 버틸 수밖에 없다. 정확한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서비스가 부럽기도 하다. 그들의 만족감은 둘째 치더라도 내가 제공할 서비스의 기준조차도 세우기 힘들다.


‘백년지대계’는커녕 하루살이 같은 수업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학기를 견디니 방학은 공연의 주인공처럼 빛날 수밖에. 개학 전 이 허한 마음은 이 업이 나에게 버겁고, 나는 아직 아마추어라는 반증이다. 무려 15년을 했는데도 말이다.




개학하면 과분한 내 밥그릇에 스트레스가 찬다. 방학이 되면 스트레스는 뜨거운 조명 속에 증발한다. 빈 그릇은 공허하다. 늙은 머리카락만 방학을 증명할 뿐. 개학 전 머리카락을 자르며 나는 빈 그릇을 닦는다. 깨질세라 조심스럽다. 담기는 스트레스는 살기 위해 먹는 밥이다.

측백나무를 보며 잠시 출근해서 나처럼 40일 동안 쉰 책걸상을 닦는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방학을 보냈는지, 아이들이 그리웠을까. 더 나은 서비스를 고민하는 시간이었을까. 안식의 시간이었을까. 다가올 소음에 무장하는 시간이었을까. 한결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책걸상을 닮아 가면 나도 퇴직 전에는 진짜 프로가 될까 잠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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