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물킴 Mar 12. 2021

퇴사를 하고, 요리를 해 보았다.

퇴사를 하기 1-2년 전부터, 그러니까 팀장 직책을 맡은 이후부터 수시로 몸이 아프고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십여 년간 유지했던 몸무게는 갑작스럽게 10kg가 불어나기도 했고, 알 수 없는 염증이 몸에 퍼져 응급실행. 결국 수술을 하기도 했다. 



0. 인간은 왜 무언가를 잃어야만,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 뒤로 나는 자연스럽게 '건강'의 유한성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나의 식습관과 운동습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해 먹는 요리, 간단한 운동 등을 일상 속에 집어넣으려고 애썼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상화'를 해내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일상성'을 벗어나는 노력은 쉽게 포기하게 되었다.



1. 처음엔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들었다.

자취요리라고 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그 간단한 요리를 하기 위해선 온갖 양념들과 부재료들을 갖추어야 했다. 버리게 되는 식재료도 많았고, 재료 구매부터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시간까지 들이고 나면 기진맥진해 퇴근 후 시간을 모두 써버리기 일수였다. 끊임없이 배달요리와 외식의 유혹이 나를 괴롭혔다. 물론 간간히 그것들을 이용했지만, 차츰 횟수를 줄이려고 애썼다.



2.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요리에도 도움이 된다.

인생 최고의 선배님, 유튜브 선배님께서 요리를 해나가는 데 있어 큰 가르침을 주셨다. 쉬운 난이도의 요리들은 1-2분을 투자해 유튜브를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얼추 괜찮은 맛을 내기도 했다. 자꾸 따라 하다 보니, 다양한 의문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소스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 재료는 왜 이때 넣는 걸까?', '여기서 조금 다른 맛을 내려면 어떤 부분을 수정해 레시피를 완성해야 할까?' 질문의 답을 찾아나가다 보니 단순히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을 넘어서, 더 많은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레시피의 원리와 식재료에 대한 이해가 차츰 되어가기 시작했다.



3. 새로운 식재료에 도전하고 싶어 졌다.

필요한 필수 양념, 재료들을 집에 갖추고 난 뒤에는 장을 보는 요령도 생겼다. 먹고 싶은 것을 무작정 잔뜩 사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제철 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계절마다 가장 싸고 맛있는 재료들이 있다. 그 재료들을 중심으로 여러 번에 걸쳐해 먹을 수 있는 레시피들을 수집하고 공략했다. 가장 현명하고 효율적인 장보기 방법이었다. 한두 개의 식재료를 집중 공략해, 내가 어느 때든 해 먹을 수 있는 레시피 한 두 개를 손에 익히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다음 식재료로. 그다음 또 다른 식재료로. 


그러다 보니 점점 식재료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한두 가지의 재료만 업그레이드하면, 음식 전체의 맛이 확 올라가는 방법들을 터득하게 되기도 했다. 이쯤부터 새로운 식재료를 접하고, 다뤄나가는 것에 재미가 들리기 시작했다.



4. 요리를 통해 위로받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많지 않았다. 자존감을 획득하는 일보다는 일을 위해, 남을 위해 나를 소진해야 하는 일도 많이 생겼다. 그때마다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재료를 고르고, 다듬고, 요리를 해, 담아내고, 먹는 일련의 모든 과정이 내 뜻대로 움직였다. 내가 잘하면 잘하는대로 맛있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태워먹기도 하고 짜지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에 내가 주체가 되어 음식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고, 결국 그것이 내 몸에 들어오는 행위의 과정이 좋았다. 


부엌에선 오롯이 혼자 있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쁘게 재료를 손질할까, 더 맛있어질까 생각하는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 먹는 사람들의 표정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요리는 그렇게 내 주체성을 찾아주는 힐링 액티비티가 되어주기 시작했다.



5. 나에 대해 들여다보게 되었다.

종종 유행하는 엽기 떡볶이나, 언제 먹어도 맛있는 마법의 레시피 교촌치킨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만들어 먹는 음식이 주는 만족감은 차원이 다른 어떤 것이었다. 요리가 익숙해지자 내가 좋아하는 재료, 조리법, 식단 등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내 몸에 들어오는 음식의 종류, 맛의 강도, 식단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는 것에 대한 만족도는 엄청났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내 몸을, 내 삶을 주체적으로 장악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사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들어먹을 땐 큰 기쁨이 느껴졌다. 나는 너무 좋아하지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음식들을 만들어 질릴 때까지 아침식사로 먹기도 했다. 새로운 재료를 넣어, 찾아도 나오지 않는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먹으며 혼자 행복을 만끽했다. 


어이구, 잘 먹네. 나 새끼. 
애를 먹여 키운다면 이런 느낌과 비슷한 것일까.



6. 퇴사를 하고 외식을 완전히 없앴다.

부득이 누구를 만나서 함께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 특별한 기념일을 유별나게 챙겨야 하는 상황 등이 아니라면 외식을 하거나 배달음식을 먹는 일이 아예 사라졌다. 대부분의 음식을 이제는 내가 얼추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대표님이 먹자는 음식을 입안에 욱여넣을 필요도, 회식을 하며 배가 터질 것 같으면서도 습관적으로 집어먹을 필요도 없었다.


내 일과에 맞춰서, 어떤 주에는 브런치 식단을 탄탄하게, 어떤 주에는 밀려있는 재료들로 새로운 레시피를. 일상과 요리, 시간과 음식이 완전히 조화롭게 운영되는 시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흡사 두 발로 걷게 되었을 때, 회사 없이 돈을 벌게 되었을 때, 내 돈으로 내 집을 마련했을 때 등에도 느꼈을 법한 자립과 쾌감 같은 것이었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주체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몇 년 전만에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주로 엄마가, 동생이 해주는 밥을 얻어먹고 설거지를 자처했다. 잘하는 사람이 한 것을 맛있게 먹으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차츰 요리를 내 일상에 녹여낸 현재가 매우 만족스럽다. 좀 더 나를 발견하고, 아껴줄 수 있는 방법을 하나 더 획득한 것 같달까. 글을 쓰다가 점심시간이 늦어졌다. 요리를 하러 이쯤 하고 일어나야겠다.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퇴사를 하고, 프리랜서를 해보았다 (brunch.co.kr)

퇴사를 하고, N 잡러를 해보았다. (brunch.co.kr)

퇴사를 하고 시작한 SNS로 50번의 협찬을 받았다. (brunch.co.kr)

퇴사를 하고, 레스토랑에서 일을 해보았다. (brunch.co.kr)   






작가의 이전글 내가 좋아했던 직장상사들 BEST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