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하고, 당분간 회사생활이 아닌 다른 방식의 삶을 꾸려나가 보겠다고 마음을 먹자 생각보다 많은 것에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대부분 아주 간단하고 간소한 방향으로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식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 필요하던 각종 생활 용품들과 품위유지비 등이 최우선 간소화 대상으로 올랐다. 당연했다. 나는 단순히 1-2달의 긴 휴가에 대한 갈증으로 퇴사를 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삶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끓었기 때문이었다.
한 동안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면서, 나 또한 관련된 책이나 매거진 등을 한참 사서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잘 와 닿지 않았다.
굳이 왜 그렇게 버리라고 하는 건지.
쓸모없는 물건들을 쟁여놓고 있던 건 사실이었지만 집이 그렇게 좁은 것도 아니었고, 언젠가 불현듯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퇴사를 하고, 쓰던 물건을 잔뜩 버렸다는 것이 나 스스로 미니멀리즘의 실천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내가 필요한 것들이 생기면 부족함 없이 살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다만, 물건을 버리는 행위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들에 대해선 기록할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더러워서 샀던 옷. 재미로 샀던 술잔. 유행한다고 해서 샀던 가방. 다양한 물건들이 집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퇴사를 하고 약 1-2달이 지나자 내가 입는 옷은 손에 꼽았고, 쓰는 물건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대부분의 물건들이 필요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물건의 쓸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회사와 남이 아닌 오직 내 생활에만 집중하게 되자, 생각보다 필요를 증명하지 못하는 소지품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상의 다이어트'라고 생각했다. 자극적인 맛에 중독되어 찾았던 짜고 매운 음식들에 거리를 두고, 식재료 본연의 맛을 음미하듯.
나는 내 일상을 간단하고 건강하게
다이어트해나가기 시작했다.
내 삶은 점점 심플해지고,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본질(essence)과 그 외의 것들이 선명히 구분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많은 것들을 버리기가 쉬워졌다.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 앞으로 필요할 것인지 아닌지 판단을 미루며 집구석 어딘가에 처박아 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고상한 정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덜고 덜어 남은 본질만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나는 미니멀리즘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몇 년간 자리만 차지했던 옷, 책, 잡동사니들을 신나게 버려댔다. 눈에 보이면 족족 내 변화된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고 즉결처분했다. 쓸만한 것들은 당근 했다. 샀던 가격을 생각하면 아까웠지만, 모셔두는 비용과 차지하는 공간을 생각하면 미련이 사라졌다. 버리면서 생각했다.
아, 나는 참 돈 쓰는 걸 즐겼구나.
반성의 의미는 아니었다. 덜고 덜어 남은 본질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소비는 필요했다. 다만, 단순하고 즉흥적인, 일시적이고 쾌락적인 소비가 상당히 많았다. 그렇게 소비해 소유권을 획득한 물건들을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있었던 건, 쾌락적 소비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나의 죄책감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방식의 소비가 당분간 내게 필요 없어졌다는 것은, 소비에 대한 개념의 성숙이기도 했지만 간단명료해진 내 삶의 방식과도 연관성이 높았다. 반드시 소비를 해야만 내 삶이 영위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방대히 모아 왔던 책은 과감히 정리하고 전자책을 적극 사용했다. 독서의 효율면에서 월등했다. 격식에 맞는 한두 벌의 옷을 제외하고는 편안하고 품질이 좋은 옷들만 최소한으로 소비했다. 옷이 나의 인격과 수준을 말해주는 수단이 되기엔 더 이상 역부족이었다. 온갖 기념품들을 버렸다.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하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하되, 쓸데없는 것을 사모으는 습관을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내 추억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그 추억을 소비로 기억하고 싶어 했던
나의 습관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전자책으로 출시되지 않은 책들이 읽고 싶다면 샀다. 계절이 바뀌고 이쁜 옷이 눈에 띈다면 샀다. 두 다리만 있다면 너털너털 오를 수 있는 등산을 즐겼지만, 돈이 많이 드는 다이빙 같은 취미도 즐겼다. 하지만 소비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느끼던 습관은 점점 사라져 갔다. 대신,
어떻게 하면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불필요한 소비를 최소화하고, 내가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위한 소비만을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생각의 습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비의 패턴과 방식, 규칙들을 바뀌어가는 라이프스타일에 맞춰서 모조리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비우면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버리면 아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비우고 버리고 나서 나에게 찾아오는 감정은 자유로움과 해방감이었다.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것.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아주 최소한의 소비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쌓인 소비력으로 완전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내 삶을 영위하는데
그리 많은 물건과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느껴본 적 없던 해방감을 느꼈다.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비용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선택하지 못했던 옵션들. 이제 나는 좀 더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선택하고, 소비와 비용이 그 선택을 발목잡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고상하고 순결한 삶의 방식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변화된 삶 속에서 내가 발견하게 된 사소한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 퇴사를 하고, 나는 가벼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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