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다 진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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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동토에서의 생활이 달포 가량 지나고 보니 머리가 긴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발을 해야 되겠는데 이발 기구가 없다. 중대 전체에 문의해 보아도 없다는 거다. 알고 보면 있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전부 담배 고기 두부와 맞바꾸어 먹고 난 후였으니까. 각 소대 부소대장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중대장실에 가니 두 명의 부소대장이 이미 와있었다. 차근차근 이동 당시 순서대로 따져가며 이발기구의 행방을 조사하는데 마지막 순서가 내 소대였다. 내 소대에서 사라진 이발 기구의 책임 추궁을 당할 일만 남은 것이다. 오전 토의가 끝나고 점심 먹고 난 직후 다시 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큰일 중의 큰일이다. 무어라 둘러댈 것인가.


핑곗거리가 생각나질 않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있으나 밥맛이 없다. 혓바닥 위에 돌멩이 굴리듯 생각을 굴려보며 간신히 삼킨다. 그래도 조금씩 주는 밥은 먹어야 한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각자 보따리를 갖고 전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나도 운동장으로 갔다.

중대장이 말하였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자는 옆으로 나오시오.”


상당수의 인원이 호명되어 갔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마른침을 삼키면서 바짝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는데 순간 내 이름이 불러진다.

“예.”하고 나도 별도의 대열에 섰다.

“지금 호명한 자는 모두 이동이다.”


나는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나중에 책임 추궁이 있다 해도 그건 그때 가서 얘기고 당장에는 위기에서 모면하는 거다. 나는 잔류하는 소대원들을 둘러본다. 줄에 묶인 마른 굴비 한 두름처럼 이북의 방방곡곡 낙오자 없이 끌려다니면서 숱한 폭격에도 살아남고 이곳의 살인적인 혹한을 부둥켜안고 견뎌낸 우리인데 이렇게 헤어지다니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것인가.


전쟁이 끝나 자유대한민국 품 안으로 돌아가야만 상면할 수 있으리라. 인간사의 회자정리는 엄연한 법칙이지만 죽음의 땅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다 헤어지는 이 마당에 생살을 발라내는 아픔이 밀려온다. 어딜 가나 우리의 우정은 변함이 없건만 어쩌면 영 상면 못 하게 되지 않겠나.

서로의 눈에는 피보다 진한 눈물이 가득하다.

나는 서른 명의 소대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여러분, 나는 간다. 오전에 이발 기구 문제는 간단히 설명하였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마. 내가 처분했다 하라. 다들 부디 몸조심해서 살아서 다시 만나 보자.”


나는 이것이 밝혀지는 날에는 무서운 처형이 뒤따를 줄 알면서도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당당히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소대에서는 나 혼자만 떠나는 것이다. 모르는 남남끼리 만나 생사고락의 험난한 파도를 함께 넘을 수 있었던 저력도 우리 서로 따뜻한 인간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것과 네 것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오로지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 속에서 풍전등화를 지키면서 버텨냈다.

단칼에 끊어내기 어려운 정을 어쩌지 못해 서로서로 손 붙잡고 목숨 보존할 것을 두 번, 세 번 당부하면서 헤어진다. 나는 여기서 또 한 가지 무거운 짐을 벗는다. 부소대장이라는 부담감 가는 직함이다. 동료들 고충 보살피랴, 소대장 중대장 눈치 살피랴, 마음고생 많았던 나였다. 떠나는 나의 마음은 가벼웠다.


그 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잔류한 나의 소대원들은 취조를 당하였고, 이발 기구를 팔아먹은 소대원은 결국 발각되어 영창에 해당하는 방공호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떠난다 하면 만주 땅이 아니면 남쪽뿐이다.


오후 겨울 해는 짧기만 하다.

근저에서 고동치는 활화산 백두산의 혈맥이 기운차게 뻗어 나간 자강도 내륙 고산지대의 험준한 산세들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남북방향 낭림산 줄기와 연화산 줄기, 동서 방향 적유령 산줄기와 학성산 줄기, 북동에서 남서 방향 묘향산 줄기, 북서에서 남동 방향 승적산 줄기와 비삼봉 산줄기 그리고 피난덕산 줄기가 빽빽하게 교차하며 맞물리는 하늘 아래 융기한 땅에는 고산 분지가 발달해 있다.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도 머지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준령을 넘고 넘어 80리 남쪽 시중(時中)이라는 골짜기에 도착했다.

이곳도 국민학교가 있고 골짜기는 제법 넓다. 교실은 시내가 아닌 산중이다 보니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나의 숙소는 교실 7칸 중 중앙에 있는 교무실이었다.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람도 손쉽게 찾아들지 않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였다. 일과는 매일 정치교육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상 전환의 이념교육이었다.


『북한의 최고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은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상보다도 최우위에 있으며 사회의 모든 부분을 구속하는 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당규약 전문 “조선로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는 규정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들은 주체사상을 인간 중심의 새로운 철학 사상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 원리로 인간이란 자연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고 한다.


얼핏 보면 주체사상이 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발전해온 사회적 속성으로 사회의 일원이 아니면 개인의 자주성과 창조성은 성취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김일성 주체사상에서의 주체는 결코 개인이 아닌 개인의 집합적 존재인 인민대중이며, 당과 수령의 영도 하에서 하나의 사상과 하나의 조직으로 결속되어 김일성과 당에 복무하는 피동적 수동적 존재로 전락한다.


결국 그들에게 주체의 개념은 인민 개개인의 자주성이 아니라 김일성 한 사람의 권력 확충을 위해 모든 북한 주민을 조작하여 기계적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만드는 것이 이념의 본질이다.』

- 북한문학사전 인용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그 교육이 머리에 남지 않는다. 강사는 열이 나게 강의하나 우리들은 시간 보내기 동조자에 불과하다. 이곳의 생활도 두어 달 지났다. 수용시설에서 외부와 차단된 생활을 하는 우리는 전선의 상황이나 휴전회담의 결과 등 전혀 알 길이 없다. 아무리 눈을 굴리고 귀를 쫑긋 세워 봐도 바깥세상에서 불어오는 한 가닥 실바람 잡을 수가 없다. 놈들이 파놓은 우물 안에 갇힌 빼빼 마른 개구리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벽은 너무 높고 우물물은 마르기 일보 직전이다.

마른땅 진 땅 가리지 않고 폴짝폴짝 뛰어와서 가둬진 우리들은 목청이 봉쇄된 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놈들은 휴전협정이 진척되는 형편을 봐가며 우리들에게 하나라도 더 김일성 유일사상을 주입시킬 작정인지 휴전 후 남한으로 가게 되면 공산당의 일원으로 활약해줄 것으로 믿고 철저한 교육방침을 세워놓은 것 같다. 이제 지긋지긋한 꼭두각시놀음에도 신물이 난다. 언제쯤 갑갑하고 비정한 이 우물을 벗어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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