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가 된 것 같아 괜히 속상했다면 - 혠작가
어떻게 너는 손해를 하나도 안 보려고 하니?
대학원생 시절, 팀플에 참여하는 동료의 기여가 너무 적다고 느꼈을 때, 나는 어머니께 한참을 불평했다. 내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동안 당연하다는 듯 무임승차하는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다. 분노를 모두 털어놓은 후, 어머니가 내게 던진 말은 예상 밖이었다.
"어떻게 너는 손해를 하나도 안 보려고 하니? 세상일이 그렇게 자로 잰 듯이 돌아가는게 아니야."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서운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서 곱씹어보게 되었다. 손해를 참으면 호구가 되는거 아닌가. 만만함의 신호탄이 되는 것 아닐까. 이 사태에 한마디 제대로 따끔하게 하지 않으면 바보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기분탓인지 그날의 나와 같이 자신의 손해에 유독 민감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된다. 하다못해 식당에 줄을 서 있을 때도 날이 서있다. 누군가는 카페에서 주문이 늦어지면 직원에게 불만을 쏟아낸다.
물론 정당한 권리를 찾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잊고 있는 것은 세상이 언제나 완벽하게 공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공정함의 기준도 주관적이여서, 어쨌거나 나를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음에도 이를 스스로 느끼기 어렵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의 배려 속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운전할 때 양보해주는 낯선 운전자들, 바쁜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문을 잡아주는 이웃들. 보이지 않는 배려와 양보에 에워싸여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작은 손해를 감수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가 받고 있는 무수한 배려에 대한 작은 보답이 아닐까.
돌아가 대학원 때 더 많은 역할을 맡았던 경험은 결국 더 많은 지식과 경험치를 가져다주었다. 당시에는 불공평하다고 느꼈지만, 어쨌거나 그 손해가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의 손해에 대한 분노와 집착 자체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단지 마음의 평온함을 앗아갔다는 사실이다.
삶은 논리적이지 않고, 완전하지도 않다. 정당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합당한 대응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거기에 감정과 자아를 쏟아붇지 말고 한 발 물러서 상황을 수용할 여유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