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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분리되셨어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 없으세요.

by 와와치


“남편과 분리되셨나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1336이라는 번호를 처음 눌렀던 날, 남성 상담사분께 들었던 말이다. 이곳은 국가가 운영하는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이라는 센터로 국민의 도박중독 문제를 관할하고 있다. 모든 과정이 무료로 진행되며, 전화, 문자, 게시판, 대면 상담이 모두 가능하다.


이혼 28일 후에야 그간 남편이 산책한다던 길, 자주 가던 국밥집, 가출 후 결제를 시도했던 모텔, 실종신고 후 경찰에게 잡혔던 장소들을 로드뷰로 추적한 결과, 그 일대에 사설도박장이 빼곡했음을 알게 되었다. 한 달 회사에 나가지 않는 동안 그는 매일 산책을 나갔고 그때마다 피시방에 간다고 했었는데, 그 일대에 도박을 할 수 있는 창문이 다 막힌 성인피시방이 있다는 것도 확인됐다. 화투 점수도 못 내는 내 눈에 당시 그런 곳이 보이지 않았는데, 멀리 떨어져 로드뷰로 보니 그제야 보였다. 그때의 나는 위에 나열된 사건사고들의 해결, 수습만으로도 벅차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런 생각까지는 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나는 지난 몇 년간의 특징적인 일화들을 한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설명했다. 차분한 목소리의 상담사님은 간간히 네, 네 답해주시며 정말 친절하게 경청해 주셨다. 있지도 않은 친정 오빠에게 그간의 서러움을 털어놓는 여동생처럼 나는 세세히 그의 행동들을 일렀고, 이를 다 듣고 난 상담사님은 나름 명쾌하고 간결한 목소리로 공감을 표하셨다.


“도박중독, 맞는 것 같습니다.”


그간의 심증이 비로소 물증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도박은 안 했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기간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그 의혹은 곧 풀렸다. 상담사 분께서 거짓말은 도박중독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흑백이었던 내 생활이 컬러로 변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 명확해졌다는 뜻이다. 그래, 나는 지난 십여 년을 흑백 무성영화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생생한 색깔도 진실의 소리도 없는 네모난 상자 속에.


“죄책감 같은 건 갖지 마세요.”


먼 곳에 홀로 남은 그를 우려하는 내 말을 가만히 듣던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나에게 죄책감을 갖지 말 것을 재차 강조했다. 그럼에도 나는.


나 : 지금 제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나요?


그 : 일단, 아내 분 먼저 치료를 받으셔야 됩니다.


나 : 아, 제가… 아니, 제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가요?


그 : 네. 지금은 본인을 먼저 생각하셔 됩니다.


나 : (독백) 아… 근데 저를 먼저 생각한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서요…


그동안 나는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는 남자’ 살았다. 그 세월이 길어지면서 나 또한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는 여자’가 되어버렸나 보다. 그러니까 나는 분리불안이 심각한 여자어른이 되어버렸다. 늘 혼자가 제일 편한 씩씩한 나였는데, 그 당찬 여자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지난 시간 동안 정신없는 일들이 쓰나미처럼 들이닥친 덕에 나는 나를 챙기는 법을 잊어버렸다. 정말 간신히 버티고 있었고, 트랩에 갇힌 동물처럼 벗어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상대방이 사고를 치면 칠 수록 정이 떨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그 반대로 작용했다. 그가 문제를 일으킬수록 나는 더욱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집착하게 되었다. 더 매달리고 매몰되어 갔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보면 이는 중독자가족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공동의존 증상이다. 외부에서 보는 사람들 눈에는 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테지만, 그 안에 갇힌 사람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버린다. 정신을 차리고 중독자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정말 쉽지 않고, 또 간신히 벗어났다 하더라도 죄책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이 잘 떠나지를 않아 괴롭다.


지금도 그가 좋아했던 음식을 먹을 때나, 내가 즐겨 만들어주던 음식을 먹을 때면 그가 떠오른다. 그는 지금 뭘 먹고 있을까, 앙상한 뼈만 남았으면 어쩌나. 일상 속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근거 없는 죄책감에 한동안 힘들다. 그럴 때면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당부하던 상담사 분의 말을 되새기면서 나 자신을 달래곤 한다. 함께한 세월이 긴 만큼 그에 관한 나의 습관도 깊기에 양가감정으로 힘들다. 나에게 너무나 큰 피해를 준 사람을 걱정하게 되는 나의 감정은 내가 봐도 혼란스럽다. 상담사 선생님의 우려 섞인 말씀대로 나의 ‘공동의존’이라는 병은 생각보다 더 깊은 듯하다. 보통 사람들이 병명도 모른 채 병에 걸려있듯, 이미 오랜 기간 나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도박에서, 나는 도박을 하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둘 다 살 수 있다. 그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 나를 먼저 생각하자! 말도 안 되는 죄책감 같은 건 던져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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