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작가 Oct 30. 2022

아들, 시골로 오지 말아야 했을까?

10년이 지나고 엄마가 내게 물었다

  시골로 오지 말아야 했을까?


  엄마가 내게 물었다. 귀촌을 한 지 꼬박 10년이 되던 해였던 것 같다. 거실에 앉아 손뜨개를 하던 엄마는 어느새 나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엄마의 그 질문은 뭐랄까. 슬픔도, 회한도, 안타까움도 아닌 그 언저리에 있는 그래, 꼭 다 저물어 가는 노을 같은 질문이었다. 벅차기도 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자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 켠이 먹먹해지는 노을 같았다. 입대 전, 나의 조금 먼 미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내가 서울로 다시 올라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테면 내 대학 진학과 고등학교 이야기였다.



  나에게는 아주 오랜 친구가 있다. 친구의 기준이 꾸준한 연락과 관심이라면 이제는 친구가 아니지만 마땅히 부를 만한 호칭도 없다. 아무튼 그 친구는 내가 아주아주 어릴 때, 기억도 하지 못하는 시절부터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놀이터에 투닥거리며 친구가 된 나와 그 아이는 내가 송파의 아파트에서 남양주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다시 산속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몇 번은 내가 이사 온 머나먼 곳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엄마들끼리는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아서 소식은 익히 들었다. 스무 살이 되어 둘 다 서울의 대학에 진학했고 나는 거의 5년 만에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다. 아직 술이 어색할 그 시기에 세 살부터 놀던 소꿉친구와 술자리를 가졌고 서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친구와 나는 정반대의 삶을 걸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그 친구의 부모님은 우리가 송파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남 8학군으로 친구와 친구의 동생을 데리고 이사를 갔다. 이사한 장소만 보아도 그 친구가 어떤 학창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뉴스와 다큐에 단골 소재였던 대한민국의 치열한 교육열의 선봉에 있었다. 남양주에서 다시 시골로 간 나와는 정말 반대였다. 그 친구가 학교 끝나고 학원으로 곧장 향할 때, 나는 마을에서 친구와 눈을 뭉치며 놀았다. 고등학교 때도 마땅한 학원이 없고, 인강이 취향에 안 맞았던 나는 모든 공부를 학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독학했다. 그리고 나는 만족스러운 대입 결과를 받아 들었고 그 친구도 명문이라 부를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이다. 나는 많이 놀랐다. 사실 엄마는 그리고 아빠는 교육에 관심이 크게 없었다. 방임주의였고 굳이 대학에 진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대입 계획을 대부분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며 혼자 설계했고 그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아마 엄마와 아빠가 내 대입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했더라면 나는 숨이 막혔을 것이다. 그 부담감에 더 날카로워지고 가시를 돋웠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그냥 묵묵히 응원만 해주었고 딱히 큰 훈수를 두지 않았다. 내 걱정과 고민에는 대부분 결국은 네 선택이야라고 결론을 내려주었다. 아마 누가 어떻게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을 갈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엄마와 아빠가 부담을 주지 않아서라고 답할 것이다.



  엄마는 내심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다른 부모들처럼 좋은 학원에는 보내주지 못할 망정 교육 환경이 좋지 않은 시골로 내려왔으니 그것이 내 인생을 결정 지을 중대한 분기점처럼 느꼈나 보다. 물론 중대한 분기점은 맞지만 그 분기점으로 인해 나는 지금의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송파에 살았다면 엄마와 아빠도 다른 부모들처럼 대입에 목을 멧을 지도 모를 노릇이고 나는 그 숨 막히는 쳇바퀴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오히려 시골로 내려간 것이 내 교육에는 더 좋았다. 그리고 공부 이외에도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도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정말 많은 것들을. 



  이런 불편한 마음은 엄마만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빠는 늘 차로 나를 실어 날랐다. 친구들과 놀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려하면 정류장까지 20분은 걸어야 했기에 아빠는 늘 나를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주말이면 늘 나를 태웠다. 스무 살이 되어서 집에 내려갈 때도,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까지 먼 길을 달려 늘 나보다 먼저 도착했다. 도시에 살았다면 이동에 불편을 느끼지 못했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나를 태웠던 것 같다. 아빠는 아무리 이른 시간이어도, 늦은 시간이어도 개의치 않고 운전대를 잡았다.  



  엄마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빠가 자기에게 물었다고. 내가 자꾸 태워주는 게 아들한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친구들과 가고 싶을 수도 있을 텐데.라고 말이다. 그 말을 전해주면서 엄마는 이런 말을 붙였다. 그렇게 차를 태워주는 것은 아빠 나름의 애정 표현이라고. 표현이 서툴고 무뚝뚝한 아빠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그러니까 너무 부담스러워 말라고. 그런 아빠를 닮아 표현에 서툴고 무뚝뚝한 나는 그것을 듣고 꽤나 울컥했다. 아빠가 엄마에게 한 질문과, 그런 엄마의 말 그리고 아빠가 내게 품었을 마음들 때문에. 아빠도 내심 나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온 것에 마음이 쓰였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13살의 나는 엄마와 아빠가 미웠다. 왜 나를 데리고 시골로 갔을까. 도시의 삶이 너무 좋았던 나를 왜 데려갔을까. 왜 나에게는 동의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귀촌을 했을까. 엄마와 아빠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보인다. 엄마와 아빠가 했을 무수한 고민과 쉽지 않은 결정들. 나에게 미칠 모든 영향과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에 대한 마음 쓰임들. 그리고 내가 어엿한 성인이 되고 나서도 계속 품고 있었을 미안함과 안쓰러움. 나는 엄마와 아빠가 품었을 그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더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그것을 기어이 엄마와 아빠의 입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겨우겨우 눈치챈 무뚝뚝한 자식이어서.



  나는 시골로 오지 말았어야 했을까란 엄마의 질문에 아니라고 했다. 좋다고 했다. 나는 내 학창 시절이 너무 마음에 들고 시골에서 사는 우리 가족이 너무 좋다고 했다. 시골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내가 만족하는 이 삶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랬지만 그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는 잊히지가 않는다. 그 오랜 시간 품어온 묵은 질문을 토해낸 엄마는 울적해 보였다. 내가 내 자식의 인생을 원치 않는 곳으로 이끈 것은 아닌가 하는 울적함.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우리집이 좋아져버렸다. 달걀을 낳은 닭장도, 딸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딸기 밭도, 산속에 포근히 들어찬 희게 지어진 우리집도, 그리고 나를 이곳으로 이끈 엄마와 아빠도. 그러니까


  엄마, 나 후회 안 해.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았으면 해. 

    

    

이전 19화 시골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