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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디 Jun 03. 2024

끌리는 경사지 건축

  몇 년 전만 해도 “동대문의류새벽시장”에 아내와 자주 갔습니다. 보통 새벽 2시부터 5시 사이에 가면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우리 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옷에 그렇게 관심이 많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쇼핑하는 자체로 행복해하는 아내를 위해 자동차로 태워다 주고 오며, 들러리 서 주는 정도가 내 역할이 아닌가 합니다. 아내가 새벽시장에서 이리저리 다니며 옷구경을 하는 동안 혼자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심야영화를 보거나 불 켜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산책하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혼자 놀기의 진수로 살아온 능력 덕분에 몇 시간을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긴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동대문 옆에 야경으로 유명한 낙산공원이 있습니다. 고개를 넘어가면 혜화동 마로니에공원과 연결이 되어있죠.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 혜화동 부근이다 보니 이곳을 들르면 늘 향수에 젖곤 합니다. 낙산공원 성곽길에 불빛이 보이고, 새벽야밤에 혼자 걸어 올라갑니다. 불야성 같은 동대문시장을 뒤로하고 어둠 속의 가로등을 따라 빨려가듯 올라갑니다. 빨리 걸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내가 쇼핑을 마치려면 시간도 넉넉합니다. 좁은 산동네 골목을 따라 이화동 벽화마을을 지나갑니다. 불빛에 비치는 벽화는 낮의 강렬한 햇빛에 반사되는 색감과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반은 어둠에 나머지 반은 가로등에 부끄럽게 자신을 드러내어 놓습니다. 모난 돌처럼 둔탁한 계단이 섬돌처럼 쌓여있는 좁은 골목을 하나씩 오르며 찌그러진 창문의 빗살이 7-80년대를 기억나게 합니다. 낙산공원 정상에서 불 켜진 서울시를 내려다보며 웬 남자가 혼자 서 있습니다. ^^

  

  샌프란시스코의 굴곡진 지형은 허리우드 영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자동차 추격신이나 고독한 남자의 뒷모습이 나오고 등처럼 굽은 도로의 모습이 보이면 여지없이 샌프란시스코가 배경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흔한 달동네 산동네(?)가 서양인의 눈에는 어떤 재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삼시세끼 끼니걱정하며 힘들게 살아가던 가난의 상징, 산동네가 이제는 관광명소로 바뀌고 낭만의 거리가 되었습니다. 남산 밑 해방촌이나 부산 산복도로 벽화마을, 낙산공원 옆 이화벽화마을 등 시간을 내서라도 가보고 싶은 주말 나들이 장소입니다.


  경사지는 나름 매력이 있습니다. 공사의 난이도나 공사비용의 문제는 차치하고, 길을 걷다 만나게 되는 경사지 땅을 보면 혼자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멋진 집이 되겠는걸?’, ‘주차는 이쪽으로 하면 좋겠고, 테라스와 발코니, 2층은 이쪽에 출입구를 내면.....’ 계속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내 땅도 아닌 것을 ㅎㅎ  경사지에 집을 짓게 되면 지하층을 넓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하층은 땅을 가중평균해서 1/2 이상 묻히게 되면 지하로 인정받기 때문에 경사지에서 한쪽면이 외부에 노출되는 ㉮ 1층 같은 지하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경사지에서 건축이 매력적인 이유는 계획만 잘하면 계단 없이도 ㉯ 각 층 진입이 가능한 건물을 만들 수 있고,  ㉰ 스킵 플로어 형식의 다양한 평면을 구성할 수 있어 재미있는 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와 미황사의 누하(樓下) 진입은 경사지를 이용해서 독특한 진입방식으로 신비로움을 갖게 합니다. 내 집도 경사지라면 그런  ㉱ 누하진입을 계획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조망도 장점 중에 하나입니다. 단층으로 집을 지어도 확 트인 전망을 확보할 수 있고,  ㉲ 평지에서 맛볼 수 없는 개방감 또한 일품입니다. 도심지에서 지하층 배수시설은 도로 하수처리관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화장실 분뇨처리조차도 부득이 기계식으로 펌핑(pumping)해서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전 경사진에 건축을 한 적이 있는데 설계상으로 지하층아래 기계식 배수로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경사지 건축의 장점 중에 하나가  ㉳ 배수처리가 용이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계식 배수는 불합리하다는 생각에 정화조의 위치와 대지 지형의 조정으로 자연배수가 될 수 있도록 설계변경하여 처리한 적이 있습니다. 물 흐르듯 배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건축주 입장에서 볼 때 이후로도 신경 쓸 일이 없는 훌륭한 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다를 메꾸거나 산을 깎아 어마어마한 규모의 택지를 만들고 신도시로 발표가 됩니다. 위례신도시나 동탄신도시처럼 잘 구획된 택지에 반듯한 건물들이 들어서고, 도로며 기반시설이 한치의 꺾임도 없이 건설될 때, 구부러진 골목길과 둔탁한 돌계단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북촌 한옥마을에서 정독도서관을 돌아 인사동골목길로 빠져나오는 그 길이 저는 좋습니다. 평지보다는 비탈길이 좋습니다. 살다 보면 가끔은 구불구불 사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사지에 땅이 하나 있다면 내 집 하나 짓고 싶습니다. 내 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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