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랑의 형태를 비추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
괜찮아요.
시간은 많은 것들을 마모(磨耗)시킨다. 이러한 시간의 속성은 풍화(風化)라는 마법을 부린다. 거대한 산을 완만한 언덕으로 만들고 언덕을 이루는 바위들을 자갈과 모래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 인간 또한 마모시키고 변모토록 한다. 젊은 시절의 패기와 총명함은 노련함과 아둔함으로 변하고, 젊음이라는 단단함은 시간이라는 풍화 속에서 점차 깎여 이내 무너진다. 이처럼 모든 걸 다듬고 깎아내는 시간은 사랑에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시간은 설렘을 익숙함으로 만들고 익숙함을 편안함 또는 권태와 증오라는 모습으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이러한 사랑의 풍화 과정을 높은 통찰력과 발칙한 상상력으로 우리 마음에 거울 비춘다. 당신이 생각하는 풍화된 사랑의 모습은 어떠한 지.
독특한 영상미를 갖춘 미셸 공드리 감독과 뛰어난 각본자이자 감독인 찰리 카우프만이 함께 섬세히 빚어낸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많은 이들에게 최고의 로맨스이자, 오래도록 빛나는 클래식으로 사랑받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20년이란 시간 동안 오래도록 빛을 내는 이유는 뭘까? 이 작품을 본 저마다 다양한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사랑의 속성이 작품에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담긴 보편적 모호함은 관객 저마다 써온 사랑의 역사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 또는 끔찍했던 악몽을 자극하여 여러분의 사랑관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다루는 사랑관은 생기 넘치는 희극인 동시에 진창과도 같은 비극이다. 이 희비극에 담긴 보편적 모호함은 관객 각자의 사랑의 궤적에 따라 희극이나 비극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관객에게 비추는 마모된 또는 마모되어가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했던 이를 지운다는 설정을 통해서 사랑이란 감정이 가지는 가학성과 피학성을 감성적으로 그려내는 동시에 서로가 시간으로 새긴 사랑의 발자취에 대해 조명한다. 여기서 이 영화의 재미난 포인트는 사랑하는 이를 지운다는 SF적 상상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머릿속에서 지워가는 과정에 렌즈를 들이밀고 나가기를 반복하기에 이 작품이 독창적이고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놀란의 영화 <메멘토>처럼 시간을 거스를 때, 본질에 가까워지는 이 작품의 독창적인 플롯은 카메라 렌즈의 위치가 머릿속과 현실을 번갈아 비출 때 비로소 완성된다.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 장기연애를 했던 조엘(짐 캐리)은 그녀와 크게 다툰 다음날 클레멘타인이 본인의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운함과 분노에 휩싸인 그는 그녀가 자신을 지운 라쿠나라는 회사로 찾아간다. 그 또한 그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그렇게 조엘의 머릿속에서 그녀는 최근 기억부터 사라진다. 클레멘타인과 나눈 최근 기억은 끔찍하다. 헤어지기 직전에는 그저 상처 주기 위해 날이 선 말들로 서로를 난도질한다. 떠오른 악몽 같은 기억에 지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차츰 기억을 지우려 과거로 갈수록 클레멘타인과 쌓아온 발자취는 상처의 역사만이 아닌 서로의 빈 감정을 채워주었던 소중함과 설렘의 역사도 함께 담고 있었다. 이에 마음이 바뀐 그는 소중한 기억은 남기고 싶었고 자신만의 은밀한 기억 속으로 도망치지만 실패한다. 그렇게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운 뒤, 카메라는 조엘의 머릿속에서 나와 기억이 지워진 그를 현실에서 차갑게 비춘다. 서로가 미워 지웠지만, 몸이 기억하는지 관성처럼 서로가 끌렸고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처음 만나듯 다시 사귀게 된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으로 과거 서로가 오랜 연인이었다 사실을 알게 되고, 서로가 끔찍이 미워서 서로의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머릿속에서 클레멘타인을 지웠을 때, 조엘은 사랑의 기원을 기억하고 되새긴다. 그러나 머리 속을 살피던 카메라가 현실의 조엘을 비추며 마주한 진실은 그녀가 새로운 사랑 아니라 과거 새겼던 발자취의 관성이었으며, 그 발자취가 너무 끔찍해서 기억에서 지워버린 풍화된 사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서로가 너무 미워 헤어졌음에도 사과가 나무에 떨어지듯 서로가 끌려 그럼에도 다시 시작하자는 "괜찮아"를 주고받는 것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마지막 대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흰 눈을 뛰어가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비추는 장면이 3번 점차 짧게 반복되며 마무리된다. 마치 기억이 지워지고 다시 채워지길 반복하는 것처럼.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로 '티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빛'이라는 뜻으로 작품의 주 소재인 망각으로 만드는 결핍된 행복(알렉산더 포프의 시, 라쿠나의 의미 등)을 의미하는 제목이다. 작품 속 조엘과 클램을 포함한 모든 이는 과거를 잊음으로 행복해지려 하지만 몸에 새겨진 시간을 무시한 이들은 모두 실패한다.
그러나 조엘과 클램만은 유일하게 행복해보인다. 오직 그들만이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괜찮아'를 주고받는 장면이 이 영화의 마지막이니까. 하지만 마지막 대사를 이끄는 감정은 너무나도 처연하다. 괜찮다는 그 짧은 대사는 지난 실패를 모두 끌어안고 지금을 선택하겠다는 의미이자 다가올 실패 또한 인정하겠다는 대사이기에 복잡한 감정이 영화와 나 사이에서 조용히 흘렀다.
우리는 과거를 잊고 싶어 한다. 부끄러운 기억은 항상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드니까. 그렇다면 망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가? 알렉산더 포프의 시처럼? 글쎄 나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과거를 부정한 이들은 발자취의 관성으로 제자리를 맴돈다. 물론 과거를 끌어안은 조엘과 클램이 제자리를 맴돌지 다른 역사를 써갈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조금 더 성숙한 선택은 과거 또한 사랑하고 지금 할 수 있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 길이 더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이 영화를 본 여러분에게 시간이 깎아낸 사랑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오래된 사랑이 해안을 빛내는 모래 같은가 응달진 비탈 위의 흙이라고 느끼시는가. 여러분의 사랑이 어떤 형태이든 지금 그 시간이 행복하시길 바라며..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
풍화된 서로가 비추는 사랑의 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