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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유리구두, 나는 싸구려 운동화

허세는 잠시, 현실은 가성비

by K 엔젤

조만간 한국에 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가는 길이니 금의환향의 기분으로
“그동안 모은 돈으로 허세 좀 부려볼까?”
겁도 없이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을 검색했다.

그리고, 세상에나. 분명 같은 비행기 안인데도 퍼스트 클래스의 공기는 다른가 보다.
가격표를 보는 순간, 내 손끝이 살짝 떨렸다. 비즈니스석도 타본 적 없는 내가, 겨우 몇 시간 가는 비행기에서 “기분 좀 내보자”고 쓸 수 있는 금액은 도저히 아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나도 열심히 살았는데, 열심히만 산다고 되는 게 아닌가 보다.

퍼스트 클래스.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걸까.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 허세도 주제에 맞게 부려야 한다.

그래.
퍼스트 클래스는 아마 삼성가 사람들 정도는 돼야 타겠지.

그래서 나는 허세 레벨을 Lv. 2로 낮췄다.

출장(出張): 용무(用務)를 위해 다른 장소에 나가는 것.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꼭 사업하는 사람만 비즈니스석을 타라는 법은 없다.

부모님을 찾아뵈러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내겐 충분히 중요한 용무다.

그래서 생각했다.
“비즈니스 클래스, 이 정도면 탈 자격 있지 않을까?”

양심을 잠깐 내려놓고 표를 검색했다.

그리고, 그럼 그렇지. 비즈니스석이 만만했으면 누가 이코노미에서 무릎 접고 가겠는가.

퍼스트 클래스만큼 미친 가격은 아니었지만 비즈니스석은 일반석보다

최소 100만 원은 더 내야 했다.

100만 원이면 내가 좋아하는 맥도널드 햄버거를
배 터지게, 아니 1년은 먹고도 남을 돈이다.
그 돈을 쓰고 10시간을 가시방석에서 앉아 갈 배짱은 없었다.

신흥귀족으로 신분 상승하는 행복한 상상, 거기까지였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최소 비용으로 가성비 좋은 좌석을 찾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코노미석 중에서도 두 번 경유하는 표를 결제했다.


기다리는 시간 까지 합하면 비행시간 22시간 이상 걸린다.


마음에 드는 옷을 영수증도 안 보고 척척 사는 부자들에게는 이코노미 좌석 가격이 그저 껌값일 테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옷을 살 때도 가격표부터 본다.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해도,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면 수백 번은 고민한다.
그리고 결국 당근마켓을 켠다. 누가 입다가 내놓은 같은 옷을 재빨리 검색한다.

가게에 들어가서 옷을 사서 나오기보단, 주인 눈치를 보며 태연한 척 말한다.
“다른 곳도 둘러보고 올게요.”
그리고 가게를 빠져나오는 일이 더 많다. 비행기 표도 똑같다.

지금 내 손에 있는 게 이 시점 최저가인데도
“오늘 살까, 내일 다시 찾아볼까”
망설이다가 또 한 시간이 흘러간다. 티켓 가격은 오늘도 내일도 조금씩 요동친다.

큰 행운을 노리다가 작은 행운마저 놓치는 법. 혹시 내일은 이 티켓 가격이 더 내려가 있지 않을까?

그 미련 때문에 또 손가락이 멈춘다. 소탐대실은 피해야 한다.

3일간의 사투 끝에 결국 내가 고른 건, 아시아나 공동운항 터키항공.

토론토에서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이름은 터키항공이지만, 아시아나 공동운항 덕분에 아시아나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는,
그나마 가성비와 체면 사이의 타협점.


나는 이렇게 매번 긴장의 끈을 부여잡고 비행기 티켓을 산다. 신데렐라가 되려면 배짱부터 커야 한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신데렐라 팔자는 아닌 게 분명하다. 신분 상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가시방석 대신 솜방석 이코노미석에서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신고 고향길에 오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세상 편하다.

나는 언제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까? 언젠가 먼 미래에는, 경유 한 번 없는 직항 티켓을

가격 비교 사이트 들락날락하지 않고 쿨하게 사보는 날이 오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신데렐라의 꿈은 잠시 내려놓고, 오직 하나.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것. 그게 이번 여행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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