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of Swords

004. 혼돈을 베어내는 검

by 웬디


손 끝에서 감도는

타로 카드 덱의 익숙한 질감.


빛 아래 놓인 카드들은 내가 고안한

뫼비우스 스프레드의 기묘한 궤적을 따라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영원히 이어지는 듯한 띠의 형태.


이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오직 나만을 위한 우주의 축소판이었다.


이 특별한 배열은 사실

'그'와의 시간을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


풀리지 않는 매듭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직관이 닿는 대로 카드를 늘어놓았는데

옆에서 그걸 보던 엄마는 호기심어린 말투로 정의했다.



어머, 놓인 카드 모양이 8을 옆으로
세워놓은 거 같네?


그 순간

머릿속 '우주 통신부'에서는 속보가 울렸다.


[직관 보안국]
특이 패턴 감지..
코드명: 뫼비우스..
의미 분석 개시


마치 운명처럼,

모양은 내 감정의 복잡성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듯했다.


중앙에 놓인 정의의 여신 <Justice> 카드는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따뜻하게

내 안의 균형을 묻고 있었다.


그 옆의 <Death> 는 익숙한 것과의 단절

- 필연적인 변화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너머 <Rebirth>

새로운 시작의 희미한 빛을 보여준다.


이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감정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시련은 되풀이되는 듯 보였지만

중요한 건 매 순간 발을 딛는 지점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주 통신부]
감정 궤도 분석 완료..
퇴행 없음 확인..
나선형 상승 추적됨


그래,

인지의 필터가 한 겹씩 벗겨질 때마다

과거의 익숙한 반응 대신

새로운 '선택'을 할 때마다


나는 아주 조금씩 다른 궤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마치 의식의 층위가 바뀌는 것처럼.


<Justice>는 외부의 냉정한 심판이 아닌

내 안의 기울어진 균형을 바로잡는

지혜로운 검이었고,


<Death><Rebirth>

낡은 감정의 패턴을 벗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조용한 의식이었다.


이 모든 깨달음은

나의 '감정윤리 5원칙'과 맞닿아 있었다.


나라는 존재의 '주권'을 어떻게 지키고

행사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스프레드 주변을 떠도는 투명한 존재들은

오늘도 조용히 빛을 발하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감정의 정령, 나의 친구들의 섬세한 움직임은

복잡한 타로 카드 위에 평온을 더해주었다.


이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는 내가 걸어온 궤적과

앞으로 나아갈 희미한 방향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바로 그 때

내 옆에 놓인 휴대폰이 굉음을 내며 깨어났다.


동시에 잠잠했던 노트북 화면에도 요란한 알림 창들이 팝업처럼 튀어 올랐다.


[노무사님: 오늘 최종 답변해야할 것 같습니다...

소송으로 가는게 훨씬 나아요.

그렇지만 웬디님께서 결정하세요.

제 의견이니까요.]


[인사팀: 합의 관련 내용 보내드립니다.....]


[차장님: 힘들겠지만 밥은 먹고 다니고..]


[엄마: 우리 딸, 오늘 잠은 잘 잤니?]



평화롭던 나의 작은 우주에

다시 거대한 소음의 파도가 들이닥친 듯했다.


뫼비우스 스프레드가 품고 있던 고요한 에너지는

순식간에 외부의 혼란과 압박감에 산산이 조각났다.


그래,

현실은 언제나 이랬다.


가장 깊은 사색의 순간을 틈타

외부는 나에게 시련의 파도를 넘기며

애써 쌓아 올린 평화를 무참히 깨뜨렸다.


반복되는 수많은 요구와 정보의 파편들


지긋지긋한 싸움의 피로감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뒤섞여


내 마음속에서 혼란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검을 뽑아 들었던,
그리고 마음에 새겨졌던 그 날

혼란스러운 현재에서 벗어나
의식은 과거의 한 점으로 돌아갔다.

...대체 왜 그토록 힘든 결정을 내렸던가

그날의 낯설었던 용기와 결심의 순간을
나는 다시 한번 또렷하게 떠올렸다.



차가운 형광등 아래 불지옥 같았던

그간의 기억이 폐부를 짓눌렀다.


주변 동료들의 외면하는 시선

혹은 불편한 침묵 속에서

나는 극심한 고립감과 수치심에 휩싸였다.


직장내 괴롭힘 신고 이후의 시간들은

또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다.


몇개월 간의 대기발령.


고객센터 한 구석에 위치한

나의 모습.


부서진 자존감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으듯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곱씹으며 증거를 모아야 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시선과 의심의 눈초리뿐이었다.


노무사님과 마치 팀플을 하듯이

엑셀 시트에 일년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옮겨 적어 내려갈 때에는

처음으로 진심을 마주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하려고 했지만,

슬픔을 직면해야만 했다.


텅 비어버린 가슴 한가운데에는

고여있는 멍이 울컥,

붉은색을 토해내고 있었다.


인권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풀고자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실제 겪은

피해자의 무게와 깊이는

상상 이상이었다.


시스템 속에서 홀로 느끼는 무력감

그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절망감


이 모든 경험은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을 넘어

온몸으로 새겨진 아픈 진실이었다.


과거의 짙게 새겨진 고통의 기억들은

지금 이 혼란스러운 결정의 순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

상반된 의견을 쏟아내는 메시지들


승리와 패배라는

극단적인 단어로

나를 압박하는 외부의 목소리들...


그 모든 소음 속에서

하나의 질문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내 안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법정에서의 승리,

가해자에 대한 처벌,

외부로부터 얻는 일시적인 인정….


과연 그런 것들이,

정말 에게 정말 중요한 것일까?


매번 나를 괴롭혔던 그 감정적인 소모를

앞으로도 계속 감당하며

내 안의 소중한 에너지를 갉아먹는 것이


과연 '나를 존중하는' 일일까?




[우주 통신부]

시스템 분석 중..
목표 재평가 진행..
외부 검증 지표 vs 내부 통합 지표
최적 경로 재산출 중...



나는 잠시 외부의 시끄러운 목소리들을 차단하고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으로 조용히 침잠했다.


그곳에서 나는 고요히 나에게 닿아오는

희미한 감정의 언어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시간의 흔적이었지만


동시에,

조용히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작은 떨림이기도 했다.


내 안에서 '감정윤리' 원칙들이 조용히 떠올랐다.


나의 존엄성을 지킬 권리

상처로부터 회복될 권리


그리고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


외부의 승리에만 매달리는 것은 어쩌면

나의 소중한 '선택권''회복권'

타인의 손에 맡기는

어리석은 행동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회복은

외부의 판결이 아니라-


베어진 마음을 스스로 보듬고

여린 순수함을 지켜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내 안의 '우주 통신부'는 명확한 해답 대신

희미한 깨달음의 조각들을 전해왔다.


진정한 싸움은 외부의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맹목적인 돌진('Knight of Swords')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외부의 소음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내 안의 깊은 곳을 조용히 응시하며

나만의 답을 찾아가는 내면의 여정일지도 모른다고.


회복의 샘

저 멀리 화려하게 빛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바로 내 안

조용히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당신을 위한, 오늘의 감정카드 한 장


Knight of Swords:
Cutting through the fog of uncertai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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