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

by 흙땅

힘들지 않은 날을 찾기가 더 어렵지만, 그날도 어김없이 힘든 날이었다. 어딘가는 가야 하겠는데 어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 무엇도 되지 못한 나를 이끌고 무엇이든 해야 했다.


사람이 많은 서점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서점에 가려는 건 아니었다. 무작정 버스를 탔고 예전 학교 근처로 향했다. 어디서 내릴지 정하지 않았으나 예전에 자주 가던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학교를 마치면 매일 같이 들르던 서점이었다.


안국에서 하교한 뒤 종각으로 가서 책을 읽고 광화문으로 가서 또 책을 읽었다. 학창 시절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책을 읽었다. 어딜 가야 할지 모를 때 서점에 갔다. 책은 사람의 말이었으나 ‘사람’이 나에게 주는 불편함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대화하고 싶으나 대화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위해 책을 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남긴 흔적을 통해 외로움을 해소했던 것이다.


그 길을 걸어가며 나는 내가 다시 고등학생이 된 것만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마구 표출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어 펑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교보문고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주말이었으니 아이 손을 잡고 나온 가족 단위의 이용객들도 많았고 팬시를 구경하는 어린 학생들도 많았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면서부터 책을 아예 읽지 않았다. 책 보다 더 집중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 일도 그다지 잘 풀리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내가 책을 손에서 놓지 말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돌아갈 작은 쉼터는 마련해 둘걸 하는 마음에서였다.


좌판을 점령한 새로운 책들은 도무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내 눈이 닿는 모든 책들이 내가 아는 책이었고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다. 마치 나와 안면을 튼 사람을 마주치는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학기 초의 어색함으로 책을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되었다. 월든이었다. 최근에 읽었던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을 찾다 그 부근에서 발견했다. 내가 학생일 때 한 번쯤 읽겠노라 호기롭게 빌려놓고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이었다.


'아무리 비천해도 당신의 삶을 똑바로 맞이하며 살아가라. 삶을 피하지 말고 삶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도 말라. 삶이 형편없을지라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


나는 교보문고의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그 문장을 읽었다.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 매번 노력했다가 실패했다. 지금도 실패한 마음으로 이곳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몇 장을 더 읽다가 또 걸음을 옮겨 그 앞을 떠났다.


몇 시간쯤 더 걷다가 어딘가에 앉았다. 땀에 젖은 이마를 문지르니 다시금 그 문장들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나는 그 문장을 내가 가진 공책에 옮겨 넣었다.


삶이 형편없을지라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


멋지고 잘난 나를 사랑하는 것은 쉽다. 누구라도 사랑할 것이다. 저 먼 타국에 있는 사람도 사랑해 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자기 자신마저도.


그러나 그것을 시도해 줄 사람은 본인 밖엔 없다. 본인이 본인을 사랑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누가 해주겠는가? 다른 것 치자하고 ‘있는 그대로’라는 것은 나와 타인에게는 성립될 수 없다.


애초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나 밖엔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 줄 인간은 나 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지긋지긋하지만 애처로운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무 목적 없이 빌딩 숲에 홀로 앉아 마음으로 울고 있는 나. 나는 연민의 마음으로 이 불쌍하고도 사랑스러운 사람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비천해도 당신의 삶을 똑바로 맞이하며 살아가라. 삶을 피하지 말고 삶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도 말라. 삶이 형편없을지라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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