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래 Oct 21. 2021

역지사지의 경험

한국어 학급의 일상

#1


  대학생 시절 유럽 배낭여행은 청춘의 꿈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넉넉하고 화려한 문화를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로 유랑하는 것은 청춘의 상징이었다. 주변의 청춘들은 앞뒤를 안 가리고 방학 때를 맞춰 삼삼오오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앞뒤 좌우를 가려야 할 처지라 가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청춘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조금 늦은 청춘이지만 스페인으로 첫 유럽 여행을 떠났다. 주변의 경험자들이 조언 한 숟가락씩 끼얹었다. 소매치기가 극성이라 꼭 여미고 가야 한다, 장거리 비행 쉽지 않다 이것저것 준비해라 등 많은 조언을 들었다. 그런데 청춘의 꿈을 이루러 가는데 그런 걱정과 조언이 귀에 들어오겠는가? 그저 스페인 생각에 가슴이 두근댔다. 들뜬 마음에 12시간이 넘는 비행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분명 미지근하고 푸석푸석한데, 땅에서보다 훨씬 맛있는 기내식과 수시로 채워주는 포도주가 있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부푼 마음만큼 배도 푸짐하게 채웠다.     


  도착한 스페인은 꿈꿔온 유럽 그 자체였다. 건물에 창문이 많고 컸으며, 길 따라 나란히 있는 것이 각기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시에스타의 나라답게 사람들은 여유 있으면서도 활기찼다. 음식은 조금 짰지만 다양했고 건강했다. 영화나 사진에 서 많이 봐와서 그런지 낯선 듯 익숙한 분위기에 취해 많이 먹고, 많이 보고, 많이 마셨다. 그런데 분위기에 과하게 취했는지 이튿날 오후부터 배가 이상했다. 단순 과식인 줄 알았다. 덜 먹고 많이 걸으면 자연스레 소화되겠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는 아팠고, 밤이 되니 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들숨에 한번 날숨에 한번 장이 이리저리 꼬이는 듯했다. 늦은 시간이라 병원은 갈 수 없었고 근처 약국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어는 너무나 생소했다. 영어인 듯 영어가 아니라 발음도 뜻도 떠올릴 수 없었다. 간판을 보고 찾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수 없었다. 오직 구글 맵을 들여다보며 초록색 십자가만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간판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훨씬 빨랐을 텐데 초록 십자가 그림만 찾으니 시간이 더 걸렸다. 그래도 간신히 약국을 찾았다.      


  하지만 난관은 끝나지 않았다. 증상을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구글 번역기를 써봤지만 정확하지 않은지 약사는 연신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결국 ‘복통’한 글자만 번역해서 보여줬고 약상자 하나를 받았다. 고생하면서 약을 받았지만 안심되지 않았다. 온통 스페인어가 적힌 약상자는 안 먹어도 걱정 먹어도 걱정이었다. 내 증상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이상한 약을 준 건 아닐까? 언어를 모르니 의심되었다. 선택지가 없는 나로서 하늘에 기도하면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스페인 약사의 판단이 정확했다. 며칠이 걸렸지만 배는 괜찮아졌고 남은 여행을 별 탈 없이 마무리했다. 언어가 안 통하는 곳에서는 모든 상황이 비상 상황이다. 언어만 된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의심이 들어 불안도 크다.      


  나는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안 이런 일을 겪었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하루하루가 그때의 나와 같을 것이다. 일상과 학교의 모든 상황이 비상 상황일 것이다. 이 음식이 할랄 음식인지 물어보지 못할 수 있고, 필요한 물건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모를 수 있다. 학교에서는 화장실 가고 싶다고 얘기하지 못해 무작정 참을 수 있고,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그냥 교실에 있을 수 있다. 체험학습 신청이나 학교 프로그램 신청 등 어른과 상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해 손해 볼 수 있다. 이럴 때, 아이들은 스페인에서의 나처럼 답답하면서 불안하고 억울하기까지 할 것이다. 나는 잠깐이지만 아이들은 오랫동안이다.      


#2


  교육의 질이 교사를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말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나 역시 개인적 경험을 교육활동에 많이 반영한다. 어렸을 적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새 학기에 친구 이름을 외울 때 빙고 게임을 참 많이 했다. 그래서 우리 반에서 단어 공부를 할 때 빙고 게임을 자주 활용한다. 빙고 게임을 단순하지만 언어활동의 총체다. 단어를 게임판에 쓰고, 원하는 단어를 정확히 말하며 친구의 단어를 집중해서 듣는다. 그리고 내 게임판의 글자를 읽으며 체크한다.


  베트남 배경의 아이와의 수업이었다. 된장찌개부터 떡볶이까지 여러 한국 음식을 공부했고 한바탕 치열하게 한국 음식 빙고를 한 후였다. 군침 도는 주제라 그런지 곧잘 따라와 수업 시간이 남았고 같은 내용으로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베트남 음식 빙고로 말이다. 변주는 언제나 의외의 결과를 가지고 온다.      

  아이에게 베트남 음식 목록을 부탁했다. 아이는 하나하나 검색해 사진을 보여주고 자기의 발음을 따라 하라고 했다. 아이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컸고 힘이 있었다. 목소리 톤도 평소와 달라졌다. 나 역시 진지하게 따라 발음했고, 신중하게 한 자, 한 자 빙고 판에 옮겨 적었다. 진지했지만 배운 적 없는 언어를 바로 말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내가 음식 이름을 댈 때마다 아이는 배를 움켜잡는다. 차례가 반복될수록 눈물까지 닦는다. 내 발음을 지적하고 따라 읽으란다. 가르치는 입장과 배우는 입장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매번 선생님께 확인받는 처지에서, 확인하는 처지가 되니 얼마나 신날까? 어느덧 빙고 게임은 베트남어 말하기 수업이 되었다.     

  다문화 학생은 어느 나라에서 왔건, 어떤 이유에서 왔건 학교에서 소수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다문화 학생이 과반수인 우리 학교에서도 다문화 학생은 소수이며 약자다. 학교 교육과정이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기반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수업 시간에 본국 언어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경험은 매우 드물며 의미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아이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최대한 적극적으로 베트남어를 발음했다.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내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응원하면서.

이전 15화 급식과 할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