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투성이 글쓰기의 힘
학창 시절 나는 책상 앞에 성실히 앉아서 딴생각에 잠기는 부류의 학생이었다. 너무나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어서 어떤 선생님은 나를 아예 모르기도 하고, 어떤 선생님은 눈여겨보며 더러는 따뜻한 말씀을 건네주기도 하셨더랬다. 남들은 대학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하던 그 시절 나는 그런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딱 하나 글을 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형태는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쓰는 삶을 원했다. 왜 그렇게 쓰고 싶은지, 뭘 쓰고 싶은지 몰랐다. 어렴풋한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공부나 운동, 그림에도 재능이 없었지만 그나마 글쓰기는 내게 수월한 분야였다. 독후감이나 글쓰기 대회에 나가면 하다못해 동상이라도 받곤 했다. 품을 들이는 것에 비해 아웃풋이 꽤 나오는 분야였다고나 할까.
알량한 재능이 있어서였는지, 불행했던 유년시절 때문인지 늘 나는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이 좋았다. 대단한 포부도 없이 내가 가야 할 곳은 문예창작과라는 생각만으로 대학교에 입학했다.
매일 쓰고, 친구들의 글을 읽고, 신랄하게 비평했다. 소설 수업을 들으면서는 내 이야기의 토로가 아닌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실제로 교수님으로부터 소설을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나는 돈이 필요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연애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 소설을 쓰기엔 능력도 열정도 부족했다.
일찌감치 마음을 접고 취업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었던 사람 치고는 동기 중에 제일 먼저 취업했다. 공공기관의 사보를 만드는 회사였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고 이야기로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일은 적성에 잘 맞았다. 글을 쓰면 월급이 들어오는 것도 썩 좋았다.
같은 회사에 다녔던 학교 선배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글 쓰는 일을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엔 자기만의 글을 썼다. 외줄에 몸을 맡긴 채 창문을 닦는 인부를 보고도 그는 시를 썼다. 매일 괴로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더니 시집을 내고 문학상을 받았다. 진짜 '글'이라는 건 저런 사람들이 쓰는 거구나 싶었다. 당장 돈이 쥐어지지 않아도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멈출 수 없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신비로웠다. 선배는 글과 함께 그림을 전시하기도 하고, 강연을 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다져나갔다. 그런 그를 만날 때면 나는 매번 울었다. 월급 받고 글 쓰는 일이 싫지 않았으면서도 그 순수한 마음이 부러워 그 앞에선 늘 작아졌다.
인터뷰이를 만나고, 그의 메시지를 적당히 포장해서 글로 옮기는 일. 못하지 않지만 잘하지도 않는 일. 결국은 내 것이 아닌 나의 글. 클라이언트로부터 기자나 작가 혹은 선생님으로 불렸지만 사회의 면면을 날카롭게 꼬집는 진짜 기자도 아니요, 작가도 아니요 내 포지션은 늘 애매하기만 했다.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가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쓰고 싶은 말은 있었으나 그것을 세상에 내보일 자신이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이 시대에 감히 '엄마'로 인해 내가 너무 괴롭다고, '엄마'를 떠날 결심을 했다고 쓰기엔 나는 너무 정상인인양 살아왔으므로. 그늘 없는 사람인 양 연기하며 지내왔으므로. 그러나 내 안에 곪은 상처를 먼저 꺼내놓지 않고서는 어떤 새로운 문장도 시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다. 알량한 글쓰기 재능이 신내림도 아니건만 마음 한 편에는 늘 써야 한다는, 쓰지 못했다는 부채감에 시달리면서...
그러다 결국 몸과 마음이 무너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내 손을 잡아준 건 다름 아닌 '글'이었다. 그토록 외면하고 모른척했던 글이 먼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모두가 잠든 밤 어둑한 스탠드 조명 아래 앉으면 손끝으로 서러움이 밀려 나왔다. 체면도 없이 분노와 절망의 가장 솔직한 단어들이 쏟아졌다. 그때서야 진짜 글의 힘을, 본질을 깨달았다.
마음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왜 글을 쓰는지, 그 글은 왜 아름다운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겠다. 매일 글을 쓰면서 읽어주는 이들의 반응을 소중하게 받아 든다. 그것이 요즘 내 일상의 가장 큰 위로이다.
글을 매개로 세상에 내 이야기를 전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 만으로 기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모든 기록엔 의미가 있다는 것도..
4년 전에 쓰기 시작했던 브런치북이 '완독률 높은 브런치북'으로 브런치스토리 메인에 걸려있는 것을 확인한 오늘 그 감사의 크기는 더욱 커졌다. 글을 기록하고, 모으고,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플랫폼이 있음에 감사했다. 안에 고여있던 상처를 글로 풀어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나만큼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늙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일러주고 싶다.
괴로워서 걸을 힘도 없다면, 손가락만이라도 움직여서 당신의 무거운 이야기를 털어놔보라고. 무거운 마음과 상처라는 게 형태가 없어서 글로 쓰나 안 쓰나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타닥타닥 타자 끝에 문자로 새겨지는 글에는 분명 치유의 힘이 있다. 매일 밤이면 죽음을 떠올리던 나날들을 과거로 만들 수 있었던 건 모두 글쓰기 덕분이다. 이 뻔한 처방이 누군가의 마음을 툭 건드릴 수 있기를 바라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