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의 재미
바다 근처에 살아서 좋은 점은 리조트 워터파크에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겨울쯤에 특가로 올라온 시즌권을 끊어두면 아이는 무제한, 부모는 50%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6월이 되자 실외 놀이기구와 파도풀도 오픈했다기에 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이른 물놀이에 나섰다.
작년에는 키가 작아서 이용하지 못했던 시설을 올해는 당당히 누볐다.
아직 제대로 된 여름 성수기가 아니라 그런지 어마어마한 높이의 워터슬라이드도 줄 서지 않고 질릴 때까지 탔고, 튜브에 몸을 맡긴 채 커다란 파도에 맞서며 신나게 놀았다.
불과 작년 초까지만 해도 체력이 너무 약해서 내내 선베드에 누워있는 신세였는데, 이젠 달라졌다. 핸드폰도 락커에 넣어둔 채 오로지 물놀이에만 집중하며 그야말로 온몸으로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열심히 운동하며 체력을 끌어올린 덕인 듯하다. (여전히 평균에는 못 미치지만.. 예전 생각을 하면 이 정도도 감격할만한 성과다.)
사실 아이와 워터파크에 올 때 내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바로 물놀이 후 즐기는 사우나! 큰 수술 이후 배에 선명히 남은 메스 자국 때문에 공중목욕탕에 가는 일을 꺼려왔던 나였다. 하지만 딸과 함께 워터파크에 다니려니 피할 수가 없었다. 맨 처음 워터파크 락커에서 옷을 갈아있던 그날, 어쩐지 느껴지는 듯한 시선에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하지만 역시 처음이 어려운 거였다.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 중 아무도 내 몸뚱이에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은 뒤로부터 나는 사우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어유 좋아. 어유 좋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옛날 목욕탕에서 보던 아줌마들처럼... 뜨거운 물이 이렇게 심신을 감싸주는 거였다니. 신세계였다.
네 시간쯤 아이와 워터파크를 누비다가 우리는 사우나로 향했다.
"야 오늘 너랑 물놀이 많이 했으니까, 엄마 사우나 시간 30분은 줘야 돼. 알겠지?"
"아 안돼!"
"나도 안돼~ 너 그럼 냉탕 가서 놀아."
어른들이 왜 온탕에 몸을 담그고 시원하다고 하는지 통 모르겠던 그 당시의 나만큼 아이는 컸다.
뜨거운 물속에 앉아서 눈을 반쯤 감은 채 '너무 좋다'를 연발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는 아이에게서 과거의 나를 본다.
처음엔 가볍게 37도짜리 석류탕에 앉았다가 익숙해지면 39도 탕으로 옮긴다. 아이는 37도가 좋다 하고, 이제 나는 37도로는 안된다. 39도가 딱이다. 그때부터 우리의 투닥거림은 시작이다.
"엄마 저기로 가자~"
"갔다 와. 엄마는 여기가 좋아."
소심쟁이인 딸은 내 옆에 붙어있고 싶지만 그녀에게 39도는 너무 뜨겁다.
"이리 와봐. 여기 얼마나 좋아." 하면서 아이의 몸을 끌어안는다. 물이 닿아 살결이 비누처럼 미끄럽고 보드랍다.
"네가 딸이 아이 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그럼 우리 이렇게 빨가벗고 탕에 오지도 못했을 거 아니야. 이렇게 좋은데" 달콤한 말로 아이를 좀 더 앉혀본다.
다정한 목소리가 싫지 않은지 아이는 좀 더 견뎌보기로 하는 듯하다.
"아빠랑은 이젠 안되지."라고 말하는 딸. 푸하하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빠랑은 안돼? 너도 이제 컸다고 그러는 거야?"
"그렇지. 그건 좀 이상하잖아."
요 꼬맹이가 언제 커서 이런 말을 다 할까 우습다. 집에서는 철없이 원숭이처럼 빤쓰 벗고도 잘 다니면서 속으론 너도 그런 생각하는 거야?
"아 좋다" 달달한 대화를 핑계 삼아 조금 더 로맨틱한 순간을 즐기려 했건만 아이는 금세 징징 모드로 돌변해 버렸다.
결국 나의 패배. 원하는 만큼 온탕을 즐기지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사우나를 나서야만 했다.
'네가 아들이었다면 아빠 손에 보내고 혼자 사우나를 만끽했을 텐데' 생각도 잠시 했지만 곧바로 접었다.
아이가 아들이었다면 난 워터파크에 오지 않았을 거야. 물놀이가 이렇게 재밌는 줄, 뜨끈한 사우나가 이렇게 달콤한 건 줄 영영 몰랐을 거야. 뱃속에 흉터를 내내 부끄러워하며 숨어 살았을 거야.
다행이야. 네가 딸이라서.
2025.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