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호랑이 엉덩이에 사네?"
우리나라 지도를 보고 있던 아이가 말했다. 그렇다. 한반도 남단, 그중에서도 경남의 소도시에 산다. 딸은 엄마가 병원에 가거나 일하러 종종 가는 서울을 짚어보더니 색연필로 주욱 그어 거리를 표시했다.
"서울이 이렇게 멀었어?" 그동안 전혀 가늠하지 못했던 눈치다.
챗 gpt에게 우리가 사는 곳과 서울의 면적과 인구 차이를 물어보니 면적은 1.5배, 인구 수로는 41배 차이가 났다. 이렇게 수치로 두고 보니 어마어마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딸은 "어쩐지 서울 갈 때 진짜 너무 오래 걸렸어."라며 색연필로 서울에 연신 동그라미를 친다.
"서울엔 사람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멋진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많고, 좋은 대학교도 많아."
아이에게 말해주며 응? 대학교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싶었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내 안의 통속적인 바람은 재채기처럼 튀어나와 버렸다.
얼마 전까지 화제였던 '7세 고시' 학원에 가기 위한 학원을 다니고, 밤새 불야성을 이룬다는 대치동 학원가를 다룬 다큐를 보고 혀를 끌끌 찼으면서도 내심 마음속엔 불안이나 어떤 바람이 있었던 걸까. 서울만은 못해도 광역시 단위의 경쟁도 치열할 텐데 지방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 딸은 어쩌면 출발선에서부터 너무 뒤처져 있는 것은 아닐까. 호랑이 엉덩이에서 얼굴까지는 너무 멀다는 딸의 말처럼. 아무래도 나도 모르게 그런 고민을 품고 있었나 보다.
"서울은 우리보다 학교도 많고, 학생들도 많아. 7살 때부터 학원 다니려고 밤새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대. 7살부터 대학교 갈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이 말을 듣고 아이가 무엇을 느끼길 바란 걸까. 어쨌든 그렇게 주절주절 말을 덧붙였다.
"나도 서울로 대학 가고 싶다." 아이는 말했다.
"왜?"
"그냥 서울엔 재밌는 곳도 많고, 좋은 대학교도 많다며."
행복은 결코 서울에 있지 않다고, 지방 작은 도시에서 사는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딸의 대답이 반가웠다. 그래 너는 서울로 가야지. 더 넓은 세상을 봐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동네는 너무 작아서 너희 반에서 제일 잘하는 걸로는 안돼. 학교에서 제일 잘하는 1등이 된다고 해도 전국단위로 보면 1등이 아닐 가능성도 높아. 대학 갈 때는 전국의 수험생들이랑 경쟁하는 거거든."
초2짜리를 붙잡고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아이 입에서 무심결에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다는 한 마디가 나오자마자 난 이날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것처럼 조목조목 설명을 보탰다.
"1등 못하면 안 되는 거야?" 아이의 물음을 듣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너 원래 대학 안 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엄마 아니었어?
"그건 당연히 아니지! 그냥 그런 세계가 있다고~" 깊어지려는 대화를 애써 가볍게 마무리해 버렸다.
대전에 살 때는 막연히 서울로 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무색무취의 노잼도시라는 닉네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더랬다. 지금이야 성심당의 도시 핫플레이스로 주목받는 대전이지만.. 내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그건 서울이었고, 그 이외 곳에서의 삶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내가 남쪽의 소도시에 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결국 은근슬쩍 딸의 세계에 서울 바람을 불어넣는 엄마가 되었다.
일생을 평지가 대부분인 대전에서 살다가 신혼 초 이곳에 이사와 입덧에 시달릴 때 해안선을 따라 굽이굽이 언덕과 꼬불꼬불한 길을 넘을 때면 세상에 이토록 굴곡진 길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내 작은 세상에서 길이란 직진과 우회전, 좌회전 만으로 어디로든 갈 수 있었던 거다. 그렇게 나는 완전히 다른 도시, 다른 세상에 편입되었다.
그때 뱃속에서 온갖 음식을 밀어내던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이젠 매주 받아쓰기 시험과 단원평가를 보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100점을 받아오면 그게 그리 기특하고, 60점을 받아오면 내심 실망스럽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해탈한 듯 되뇌면서도 내 아이는 100점, 1등이었으면 좋겠다.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무심코 나온 '서울'이라는 단어에 아이의 대입을 기대하고 염려하는 내 모습이 낯설다. 그리고 모르겠다. 어떤 선택이든 나보다 나은 아이가 똘똘하게 선택할 텐데 벌써 그 선택에 영향을 주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맞는 건지. 과연 서울 상경이 아이 인생의 모범답안일런지.
너무 이른 고민이지만 스스로에게 놀란 오늘이었다.
'서울'에 대해 묻는 아이에게 더 쿨하고 멋진 답변을 해줄 수 있는 나였다면 좋았을 텐데 영 아쉽다.
2025.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