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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쁜 엄마

by 김윤담

글로는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고 자기 성찰에 도가 튼 엄마인 척 하지만 일상에서 난 여전히 하수다.

모든 성찰과 반성은 아이가 눈앞에 없고, 고요한 순간에 이뤄지고.. 막상 작고 약한 존재가 곁에서 팔랑거리면 금세 피로해진다.


돌돌이로 밀어도 밀어도 자꾸만 눈에 띄는 고놈에 머리카락, 늘 반쯤 열려있는 서랍장, 식탁 밑의 빵 부스러기, 컵 옆면을 따라 칠칠하게 흐르는 우유, 짝을 잃은 양말 한 짝,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책 더미, 연필 떨어지는 소리, 자꾸만 부르는 엄마 엄마소리, 제가 얼마나 무거워졌는지도 모르는 채 척척 올리는 다리짝, 매번 하루 끝 잠들기 전에야 생각나는 받아쓰기 연습.... 이런 것들이 사소해지는 건 모두 해가 저문 다음이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진짜 나의 업무는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건만 아이에게는 세상 바쁜 엄마인 양 생색을 내는 건지.. 이런 자책도 새근새근 잠든 아이의 숨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야 든다.


아침에는 티셔츠를 바지 안에 넣네 마네로 투닥였다. 목이 긴 양말을 신느라 부러 낑낑 소리를 내는 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취침이 늦은 내게 아침 등교준비 시간은 가장 취약한 시간이다. 특히 월요일 아침은 더더욱. 얼른 아이를 내보내고 고요한 아침을 만끽하고 싶다. 10분 뒤면 아이는 현관문을 나설 텐데 그 시간이 참 길고 싫다. 정말 싫은 건 그런 나이지만..

결국 부루퉁한 얼굴로 등교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어제는 하루 종일 놀아달라 졸라대는 통에 혼이 나가는 줄 알았다. 어렸을 적 코로나가 창궐하던 그 시기 집에서 온갖 엄마표 미술놀이로 시간을 때우려 애썼던 시절의 사진을 보고 난 뒤로 아이는 내게 그때처럼 온 힘을 다해 놀아줄 것을 요구했다. 풍선으로 온 집안을 가득 채우거나, 색색 종이컵으로 탑을 쌓자는 둥, 놀이매트에 물감 섞은 전분 반죽으로 촉감놀이를 하고 싶다는 둥...

"오 마이 갓! 엄마 그때 너무 최선을 다했어. 넌 더 이상 아가가 아니야. 너 혼자서도 충분히 놀 수 있는 초등학생이라고~" 질색해 버렸다.

"그러면 엄마한테 그냥 계속 붙어있어야지." 하며 목덜미에는 손을, 허벅지에는 제 다리를 척 올리고 들러붙는 녀석. 이건 안기는 게 아니라 분명 내 몸뚱이를 휘감아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는 무언의 몸짓이다.


"그만 좀 해라~ 내가 그렇게 좋냐?" 물으니

"어!"라고 당돌하게 답한다.

"뭐가 좋은데, 그럼 다섯 가지만 얘기해 봐."

눈알을 굴리더니 얼른 한 가지를 내놓는 딸

"사랑하니까"

"다음은?"

"어... 좋은 건 하나고 안 좋은 건 여러 갠데"

"참나, 그럼 안 좋은 건 또 뭔데?"

"별 것도 아닌데 뭐라 하는 거, 뭐 흘리면 짜증 내는 거, 아기 때처럼 안 놀아주는 거, 이제 들어서 안 안아주는 거....?"

엄마가 좋은 이유는 하나요, 안 좋은 이유는 줄줄이 나온다.

아이의 지적이 정확해서 놀랐고, 부끄러웠다. 나보다 진화한 녀석은 언제나 핵심을 짚는다. 그렇게 내일은 그러지 말아야지 해놓고 맞이한 오늘도 아침부터 망쳐버렸다.


다른 엄마는 몰라도 나는 그러면 안 된다.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라는 책을 쓴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 엄마를 미워하느라 몸도 마음도 망가졌던 내가 그러면 안된다. 엄마를 미워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내가 그러면 안된다. 아이에게 서운할 일을 만들면 안 된다. 아이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미워할 것이다. 하지만 끝내 완벽할 수 없다. 나는 너무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벌을 받았다. 오늘 아침에 왼쪽 눈꺼풀이 뻐근하더니 다래끼가 난 것이다. 오후가 되어도 붓기가 심상찮게 올라와 병원에 갔다.


영혼이라곤 1도 없어 보이는 심드렁한 의사에게 불쾌하게 눈꺼풀을 까뒤집히고 나서 약을 타 집으로 오는 길, 던킨도넛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정제화물을 튀긴 뒤 초콜릿에 캔디까지 묻힌 길티 플레져 푸드, 한 입 먹자마자 혈당스파이크를 일으킬... 그러나 딸이 너무 좋아하는 마성의 간식.


평소 학교 앞에서 싸구려 젤리나 사탕이 붙은 전단지를 자주 받아오는 아이에게 "누가 너한테 단 걸 자꾸 주는 건 널 별로 사랑하지 않아서야."라고 말했던 나였다. "어린아이에게 단 걸 주면 쉽게 마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라고..


그래놓고 도넛으로 죄책감을 덮어보려 가게 앞을 사람도 바로 나였다. 역시 내가 제일 비겁하다.

그래도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색소 가득 분홍색 초콜릿이 범벅된 하트모양 도넛을 고른다. 동그란 보스턴 도넛도, 빼놓을 수 없는 스트로베리필링 도넛도.. 평소의 나라면 절대 곁눈질 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음식이 도넛이지만 딸내미 환심사기를 핑계로 내 것도 집는다. 내 신념도 다이어트도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에라 모르겠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하얀 접시 위에 도넛을 예쁘게 세팅해 두고 아이를 맞았다. 백중백발 서프라이즈 성공이다.

보자마자 가방을 던져두고 식탁으로 달려드는 딸 앞을 막아선 채 나는 회심의 대사를 날린다.

"아침에 기분 안 좋게 학교 갔지? 보내놓고 엄마 마음이 안 좋아서 준비했어."

역시 치사하다. 환장하게 좋아하는 먹을 걸 앞에 두고 화해를 강요하는 스스로의 꼴이. 속으론 '그러니까 엄마 미워하면 안돼. 알지? 나 안 미워할거지? 용서 할거지?'라고 주문을 거는 꼴이.


"나 오늘 기분 좋았는데? 오늘 수업 안 하고 마을탐방만 해서 너무너무 좋았어."

아뿔싸 또 나 혼자 북 치고, 장구를 쳤구나 싶은 사이에 아이는 도넛에 정신이 팔렸다.


그래도 마음은 훨씬 편하다. 기어코 아이 입에 단 걸 물려주고서.


한창 먹던 딸이 말한다. "근데 엄마 나 안 사랑하나 보네?"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앙큼 쟁이가 답한다.

"달콤한 거 주는 사람은 사랑 안 하는 거라며~"


202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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