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의 부벽루 문학수업을 하노라면 화자 주변의 자연환경이 클래식 음악의 그것과 일치함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대동강 부벽루와 스코틀랜드 홀리루드 성을 둘러보고 느낀 두 화자의 감회가 어떠한지 각각의 작품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텅 빈 성엔 조각달 떠 있고,
천 년의 구름 아래 바위는 늙었네.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으니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서 노니는가?
돌다리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노라니
산은 오늘도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 이색, ‘부벽루(浮碧樓)’
영명사와 부벽루를 둘러보았다. 도성 안 수많은 사람으로 번창하던 평양 옛 성은 텅 빈 채 한 조각 달만 떠 있고, 천년 세월 풍상에 시달린 바위는 금이 간 채 구름만이 무심히 흘러간다. 천손 주몽이 타고 놀던 기린마는 하늘로 올라간 뒤 주인과 함께 돌아오지 않는다. 길게 휘파람을 불며 돌계단에 기대니, 세월의 무상함은 아랑곳없이 저 산은 늘 푸르고 강물은 마냥 흘러만 간다.
스무세 살의 이색, 평양성의 감회를 회고조로 노래하다
이 시는 고려말 삼은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이 23세 때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평양 금수산 부벽루에 올라 역사와 인간의 무상함을 읊은 시이다. 찬란한 역사를 지닌 옛 성터의 퇴락한 모습을 제재로 유한한 인간사의 덧없음을 영원한 대자연과 대비시켜 노래하고 있다.
본문에 나오는 부벽루는 대동강 푸른 물결 위에 떠 있는 누각이란 뜻으로,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누각 중 하나이다. 김시습은 이 누각을 모티브로 하여 금오신화의 하나인 ‘취유부벽정기’를 쓰기도 했다.
부벽루는 무엇보다도 미스트롯에서 송가인이 불러 대한민국을 놀라게 한 그 노래, ‘한 많은 대동강’에도 등장하고 있다.
“대동강 부벽루야 변함없이 잘 있느냐~”
이렇듯 많은 얘깃거리로 등장하는 부벽루는 우리 땅이지만 철조망이 가로막혀 편지 한 장 전할 길이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의 한이 서려 있다.
작가 이색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는 원나라에 실시한 과거시험에서 1등을 했다. 그러나 원나라는 고려인에게 장원을 줄 수 없다고 하여 이색을 최종 2등으로 합격시켰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 간 최치원이 외국인 전형 시험인 빈공과에 장원한 것은 당시로서는 빅뉴스감이었다. 최치원은 실로 엄청난 일을 해냈다. 그런데 이색은 원나라 내외국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수석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의 아버지 이곡도 유명 인사였다. 남의 말을 빌려 탄 경험을 소재로 쓴 ‘차마설(借馬說)’도 교과서에 실려있는데, 정치인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는 작품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뭐가 있을까. 임금은 백성한테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해진다. 신하는 임금한테 권력을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된다. 자식은 부모한테서, 아내는 남편한테서, 종은 주인한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무척이나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 이곡, ‘차마설(借馬說)’에서
스무 살의 멘델스존, 홀리루드 성(城)의 감회를 회고조로 노래하다
젊은 멘델스존이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환영 인파가 대단하였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를 여행하며 스코틀랜드의 삶과 문화를 체험하던 중, 메리 여왕이 살았던 홀리루드 옛 성을 찾았다. 태어난 지 6일 만에 스코틀랜드 여왕이 되었다가 반역죄로 엘리자베스 1세에 처형당한 비운의 여왕 메리. 2018년 제작한 영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와 2019년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에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잘 나와 있다.
멘델스존은 홀리루드 성을 보고 난 뒤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편지에 적었다.
‘성 주변은 모두 허물어지고 황폐해져서 하늘이 훤히 보이게 구멍이 나 있었다. 나는 오늘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교향곡의 도입부를 생각해냈다.’
그렇담 이건 백퍼 회고적인 성격의 음악임을 알 수 있다. 이색이 평양 부벽루를 여행했을 때 받은 그 인상 그대로가 아닌가.
스코틀랜드 교향곡에는 옛 성(城)에 대한 멘델스존의 느낌이 그대로 제1악장 도입 부분에 나타난다. 시작하자마자 애수를 띤 서정적 선율! 누가 들어봐도 딱이다. 이어서 2악장, 3악장, 4악장 전반에 걸쳐 쓸쓸하고 적막한 하일랜드 지방의 풍경을 대체로 나타내고 있다.
멘델스존은 이처럼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당시의 쓸쓸히 흘러간 역사를 회상하면서 곡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색 역시 그러하다. 자연의 모습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서정적 자아의 쓸쓸한 심회를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인생이나 역사나 황홀찬란(恍惚燦爛)함보다 만목황량(滿目荒凉)한 모습에 예술은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그것이 아마 예술적 본능일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