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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에버 Oct 26. 2024

비가 온 뒤엔 항상 무지개가 뜬다

hardest day of my life

hardest day of my life



엊그제 아내가 인스타 스토리에 올린 문구다. 보자마자 공감했다. 나 또한 그러했으니까. 2024년 10월 22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비교해도 그렇다. 아무래도 슬픔과 힘듦은 미묘하게 달라서 그런 것 같다. 수면부족은 기본으로 장착한 상태로 감정이 화산처럼 폭발해서 견딜 수 없었던 그런 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그날이 가장 외로운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슬픔과는 다른 것일까? 잘 모르겠다.


일단, 수면부족의 원인은 바로 내 아내였다. 20일 일요일 저녁, 난 병원으로부터의 전화를 받았다. 22일로 예약한 유미의 치료에 대한 안내 전화였다. 지난번에 옮긴 새로운 병원에서 첫 진료를 보았을 때, 첫 시술의 날짜만 잡아두고 시간은 전날에 알려준다고 했었는데 그보다 일찍 연락이 온 것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간호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은 진행될 시술과정에 대해 상세히 안내해 주고 지켜야 할 금식시간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병원을 옮긴 효과가 이렇게나 강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병원의 친절함이었다. 그래서 더욱 신뢰가 갔다. 그 길었던 내용 중 우리에게 중요했던 내용은 아침 8시까지 신관 3층으로, 그리고 금식은 밤 12시부터였다.


화요일 아침 8시까지 서울의 병원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은 숙소를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 혼자서 유미를 안고 가면 어떻게든 시간은 맞추겠지만, 당연히 아내 없이 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얼마가 들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을 대비하는 우리의 심신을 달래줄 수 있는 곳을 찾았으며, 다행히 에어비앤비를 통해 가깝고 비싸지 않을 곳을 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린 21일 오후에 그곳으로 이동했다. 오후시간에 이동을 했으니 난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근처 카페를 찾아 그날 밥벌이의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이제 끝났어. 들어갈 때 뭐 사가?"


 "Water, Cup ramen and Hot dog?"


그 답장을 읽고 나는 바로 근처 편의점에서 그녀가 요구한 것들을 구매해서 갔다. 그런데


 "Why is it cold? You didn't use a microwave?"


 "전자레인지 여기에 있잖아?"


 "유미가 깨잖아."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 수면부족의 원인이 되었다.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나는 즉시 아내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솔직히 요즘 많이 쌓였었다. 유미가 태어난 이후로 아내는 맥락을 떠난 Wants를 얘기할 때가 너무나도 많아졌다. 육아에 대한 서로의 관점과 생각의 차이도 매우 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둘 다 초보인 주제에 각자의 생각과 주장도 강해서 이견이 좁혀지는 일이 잘 없었다. 그래서 근 1년간 말다툼도 잦았었다. 전과는 다르게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은 우리 아이가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의 방식으로, 나는 나의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우린 서로 수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 아이는 건강문제를 안고 태어났으며, 그것이 최근 재발하고 첫 치료를 이제야 앞두고 있으니... 나와 아내의 심신은 엄청나게 지쳐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외로워서 화가 났던 것 같다. 유미가 태어난 이후로는 우린 같이 자지 않는다. 그게 영향을 미쳤나 싶기도 하다. 성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영향 말이다. 처음엔 따로 자는 것이 쾌적함도 있고 자유도 주어졌으니 매우 좋았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싫은 것은 아니다. 온전한 내 시간을 싫어할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는 소통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아내는 24시간 내내 아이와 붙어 있으니 그 어떤 일에 있어서도 우선순위는 무조건 아이가 되어버린다. 처음엔 이런 불길한 예감이 싫어 아이가 혼자서 잘 수 있게 하는 수면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금방 포기해 버렸다. 힘들게 얻은 딸자식을 혼자 두고 재우라는 것은 나로서도 무작정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내가 따로 잔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진 24시간 같이 붙어있던 것은 나였는데 이젠 아니다. 혹시 외로움이 아닌 질투심인가?


자기가 말을 안 해도 전자레인지를 돌려왔어야 했다는 아내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배고플까 봐 먼저 물어봐 준 내 선의를 이런 식으로 받아치는 것이 어쩌면 너무 어이없어서 화를 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난 화를 내며 물어본 내가 잘못이라고 상황을 비꼬았다. 그리고 그제야 아내는 본인의 실수를 인지했는지 내게 사과했다. 하지만 내 화는 풀리지 않았다. 아내는 다음날의 위하여 바로 아이와 함께 다른 방에서 바로 잠이 들었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린 이런 비슷한 경험을 많이 겪었고 매번 반복되고 있음을 나는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새벽 2시쯤, 아내는 생각 없이 내게 유미에게 분유 먹여도 되냐고 내가 물어보았고, 난 또 한 번 짜증을 냈다. 전날 분명히 12시가 금식 기준이라고 못 박아 말했음에도 왜 기억을 안 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우리 아이의 문제잖아? 그런 중요한 정보를 왜 자꾸 까먹지? 그리고 이 감정의 찌꺼기가 다음날 제대로 발효되어 나타났다.


유미의 시술은 당일수술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일요일 통화 상으로는 말로는 1시간이라 안내를 하지만 20분 정도면 끝나는 시술이라고 얘기를 듣고 왔기에, '수술'이라는 단어가 매우 무섭게 느껴졌다. 어쨌든 마취가 동반되는 일인데 수술과 뭐가 다른가 싶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들어간 뒤, 절차대로 예약 접수를 하고 유미를 수술용으로 환복을 시켰다.


 "보호자 중 한 분만 들어가셔야 하는데 어떤 분이 들어가시겠어요?"


 "제가 들어갈게요."


선택권이 없는 질문이었다. 딸아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는 경험, 그걸 아내에게 떠넘길 수는 없었으니까. 또한, 그에 앞에서 의료진과의 소통을 외국인에게 맡길 수는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도 환복을 한 뒤 아내에게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 나 여기에 있으면 안 돼?"


 "병원에서 나가서 기다리래"


 "Are you sure?"


이 순간 대화가 길어질 것을 직감하고 바로 그녀 앞에서 접수직원에게 다시 물어보는 방식을 취해 내 말이 거짓임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아내는 그제야 밖으로 나갔다. 난 이런 게 참 외롭고 짜증 난다. 왜 내 아내는 내가 얘기하면 무조건 No부터 앞세우는 것일까? 유미가 태어나고 이런 게 너무 많아지고 심해지고 있다. 오늘같이 무겁고 중요한 날에는 제발 내가 하는 말을 그저 따라줬으면 싶었다. 난 고통의 시간을 너를 위해 내가 가져가겠다는 선택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런 것을 생색낼 생각은 전혀 없었으나 당시 아내의 태도에 실제로 그렇게 느꼈었다. 물론 나도 안다. 그녀는 그저 조금이라도 더 아이와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내 얘기에는 항상 No부터 외친다는 사실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중요한 순간에서도 난 짜증이 났었다. 어쩌면 중요한 순간이었기에 짜증이 난 것일 수도 있다.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유미를 안고 수술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뒤로는 사건 순서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간호사가 하는 말을 따르면서 행동할 뿐이었으며, 아직까지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은 사랑하는 내 아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고 내 품 안에서 힘이 빠져 잠이 들었던 모습이다. 시술 직전 진정제를 투여했을 때 그랬다. 의료진의 말처럼 정말 투여하자마자 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데자뷔가 나타났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모습.


정말 펑펑 울었다. 내 아이의 숨이 멎은듯한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병원에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땅히 내가 먼저 보여줘야 할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저 초보였던 부모의 호들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 그렇게 눈을 크게 뜨고 잠이 든 모습을 평상시에도 종종 보면서 살진 않는다. 내가 살면서 그런 모습을 본 것은 항상 누군가의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한 살배기 내 아이를 통해 보았다. 그저 잠이 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정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20분 동안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으나, 시술이 끝났다는 안내방송이 나온 뒤엔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정실에서의 유미는 마취 후유증으로 제정신을 못 차리고 울고 있었다. 내 품 안에서 고개는 자꾸만 뒤로 젖혀지고 눈물이 범벅된 감은 두 눈과 작은 입으로 엄마를 찾고 있었다. 왜 아이들은 항상 울 땐 엄마를 찾을까? 아빠가 여기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술 부위가 고통스러웠는지 유미는 끊임없이 몸부림을 쳐댔고 나는 강하게 아이를 끌어안고 내 두 눈과 코도 범벅이 되었다. 유미의 몸에 연결된 기계는 자꾸 삑삑 소리를 내고 붉은색 시그널을 보여주는데 간호사는 자꾸 괜찮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자꾸 위험신호로 보이는데 말이다. 그런 폭풍 같은 시간을 내가 어떻게 견뎌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유미에게 사랑한다는 소리만 들려주면서 집중했다.


안정실에서 유미를 안정시킨 뒤, 의사가 찾아와 경화제를 좀 많이 넣었다고 알려주었다. 조금은 농담이 섞인 톤으로 말해주어서 오히려 더 안심이 되었다. 여유 있게 시술이 잘 끝났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통제를 맞은 뒤의 유미는 평상시의 유미로 돌아와 있었기에 난 감사하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여 전했다. 내 딸의 혹을 발견한 지 1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겨우 한 스텝 나아갔기 때문이다. 1년이 넘게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살았다. 그리고 드디어 무언가를 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매우 감사했다.


그렇게 하루가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날은 하늘도 마음도 궂은비가 내린 날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예고하는 천둥소리는 내가 내었다. 귀가하려고 다시 사복으로 환복 하는 가족탈의실에서 말이다.


 "더 좋은 장소 없어? 여긴 유미가 불편해."


 "아! 그만 좀 해! 진짜!! 그럼 넌 기다릴 동안 뭐 했어?!"


이후로 우린 다음날 아침까지 싸웠다. 분명 칼로 물을 베는 행위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음에도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날, 아내는 단 한 번도 내 얘기에 Yes를 먼저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이를 처음 치료한 날, 부부싸움을 하는 멍청한 새끼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내의 저 한마디가 기폭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녀의 머릿속엔 난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질투심이었나 싶다. 정말 오랫동안 쌓인 그런 감정이었다. 울분이라고 하나? 그날은 실제로도 정말 비가 많이 왔다. 그리고 우린, 가족으로서는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했다.


어떠한 관점에서 보면, 유미는 내 첫 자식이 아니다. 아내가 내 첫 자식이다. 한국에서 필리핀 아내와 혼혈자식을 둔 남편이자 아빠의 입장에선 매우 그렇다. 외국인을 한국사회에 녹아들게끔 돕는 과정은 육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엔 둘 다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의 경계를 명확히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자의 입장에선 '설득'이 아닌 '지시'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결혼비자 없이 혼인신고만으로 코로나 기간 2년을 버티던 때가 그랬고, 그 후 결혼비자를 받아내는 과정이 그러했으며, 세 번의 거주지 이전, 한국의 직장생활과 사회보험의 중요성 등이 그러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순간들 속에서 내 아내는 왜 항상 No부터 들이미는 것일까? 내가 니즈를 이야기하면 항상 원츠로 답한다. 내가 You need to go out이라고 하면 아내는 I want to stay here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난 아내와 같이 무언가를 진행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다. 특히 Paperwork가 엮인 일이면 그 스트레스는 두세 배가 된다. 그러니 이런 일들에 있어서는 내 아내가 '딸의 입장'임을 이해하고 그저 날 따라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항상 나와 토론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개인의 취향을 가지고 토론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난 유미에게 매우 중요한 이날, 변함없는 아내의 모습에 울분이 터졌던 것이었다.


난 아내에게 악의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단순히 유미를 먼저 생각하고 말한 것뿐이었다. 뭐든지 다 해주고 싶고, 불편함은 주기 싫은 엄마의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은 뒤틀릴 수도 있다. 약간의 이기심만 섞여도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쉽게 변질되는 것이 '모성애'라는 것이다. '아빠의 마음'을 지닌 남편으로서는 그런 모성애가 불편할 때가 있다. 자식이 어딜 가서 욕먹고 다니지 않길 바라는 그 심정. 정확히 그 심정을 난 내 아내에게 갖고 있다. 심지어 이건 아내도 매우 공감한 부분이다. 본인도 필리핀에서는 날 그렇게 대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중요한 순간에 자꾸 '아내로서 또는 엄마로서' 맞서려고 한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딸로서' 따라준 적이 없다. 나도 그녀도 첫째로 자라서 그런가?


우린 너무도 다르다. 정말 오랜 시간 누구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붙어 지내고 있지만, 우린 서로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점점 더 강하게 느낀다. 싸우면서 아내와 서로 깊은 속내에 있는 심정을 다 꺼내어 보였다. 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말 많은 얘기를 쏟아내었다. 우린 수많은 이유로 다투지만 결국엔 각자 하나의 문제로 귀결이 된다. 아내는 원하는 것만 얘기하고 나는 거기에 쉽게 화를 낸다는 것. 그래서 아내는 지쳐서 얘기했다. 우린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그래서 힘들다고, 같이 있을 수 없다고... 그래, 나도 그렇게 느낀 날이었다. 그런데 우린 딸자식에 묶인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우린 완전히 다르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단어 하나가 생각이 났다.


 "Expression"


우린 그저 표현을 참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아내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고, 나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반드시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다(전자레인지 돌려 오란 말은 왜 안 했는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그렇게 얘기하니 아내도 공감했다. 그러고 나니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게 화해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우린 다시 한번 칼로 물을 베려고 했음을 인정하고 현실적으로 중요한 유미의 시술부위 실밥을 뽑으러 근처 외과를 찾았다. 그리고 지금, 유미의 얼굴은 아프기 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시술결과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치료해 준 상급병원도, 실밥을 뽑아준 동네의원도 마음에 드는 곳으로 찾았기에 3개월간 앓고 있던 내 심정은 한결 나아진 상태다. 유미를 신속하게 무사히 첫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신 분들께 감사함을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나는 오늘 혼자서 유미를 돌보았다. 아내는 일일 알바를 하러 나갔다. 엄마보다 큰 자유를 주는 아빠와의 시간에서 유미는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나중에 한꺼번에 치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을 빨리 끝내려 집중하고 있었을 무렵, 갑자기 책상 밑 내 두 다리 사이로 유미의 얼굴이 빼꼼히 나타났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는데 그 순간 다시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나도 어릴 적에 집안에서 미싱을 다루시는 아버지의 두 다리 사이로 그렇게 나타났었다. 그런 달콤한 데자뷔로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챕터가 마무리되어 매우 기분이 좋았다. 수선사의 아들은 오늘도 디지털 수선을 열심히 하며 하루를 보냈다. 오늘의 일기 끝.



South Border - Rainbow

https://www.youtube.com/watch?v=82LMqudXE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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