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게도 그를 깊이 사랑할 것도 같았다
나욱과 나는 첫 번째 데이트를 하게 되었고, 그 첫 번째 데이트로 나욱이 일하는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얼굴을 마주하고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보자, 나와 나욱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게다가 나와 나욱은 서로를 아주 재밌고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빨리 가까워졌다. 그날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또 막차가 끊기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결국 두 경기도민은 새벽까지 서울에 남아 막차를 떠나보냈다.
나욱과 밤을 새는 동안, 이담의 생각이 자꾸 났다. 지금 내 손을 잡은 손이 이담의 손이었다면. 지금 나와 마주치고 있는 눈이 이담의 눈이었다면. 그렇게 간절히 바라며 끊임없이 이담의 생각이 났고, 그럴수록 옆에 있는 나욱을 향한 죄책감이 커졌다.
나욱은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냥 이런저런 고민들…. 이라고 대답했다. 나욱은 가장 작은 것부터 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담의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해 보고 싶었던 남자애가 있다고. 그래서 그 남자애가 자꾸 생각난다고. 대신 나욱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이담의 생각이 아주 잠깐 난 것처럼 말했다.
너는 무슨 생각해? 내가 나욱에게 물었다. 나욱은 자신도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고민이냐고 묻자, 나욱은 우리 사이는 이제 어떻게 될까. 라는 말을 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우리 사귀자. 이러면 고민 안 되지?”
나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1일이 되었다.
첫 번째 데이트 날, 첫 번째 밤을 함께 새우고 나서 나욱은 나를 여자친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술김에, 새벽 감성에 곤란한 관계를 만든 데 절망했다. 나욱을 생각할 때마다 이담이 함께 생각났다. 이담 때와 같이 관계를 망칠까 봐 두려워서도 있지만, 나욱 대신 이담이 보고 싶어서도 그랬다. 나욱은 벌써 나를 여자친구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가 도저히 남자친구로 여겨지지 않아 죄책감이 들었다. 분명 나욱은 다정하고 멋져서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나욱에게 호감이 느껴지는 것도 맞았지만. 내게는 아직 이담의 존재가 너무 컸다. 내가 남자친구로 여기고 싶은 사람은 이담이었다.
이틀 뒤, 나욱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내가 사는 동네로 나를 만나러 왔다. 나는 그런 나욱을 무슨 낯으로 만나야 할지 걱정했다. 나욱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사귀자고 한 일을 없던 일로 만들까도 생각했다. 나는 역으로 걸어가면서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내가 실수했어. 나 아직 이담이라는 아이를 잊지 못했어. 우리 다 없던 일로 하자. 애초에 내 신년 목표는 ‘술, 담배, 남자 멀리하기’란 말이야….
하지만 역 앞에서 만난 나욱은 꽃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미와 안개꽃을 분홍색 포장지로 감싼 꽃다발이었다. 나는 처음 받아보는 꽃 선물에 나욱에게 하려던 말이 전부 증발해버리는 마법을 경험했다. 정말, 정말, 너무 좋았다.
그날 나는 나욱의 손을 꼭 잡고 내가 사는 동네를 함께 걸었다. 날씨가 상당히 추웠는데도 맞잡은 나욱의 손이 너무 따뜻해서 전혀 춥지 않았다.
그 만 오천 원짜리 꽃 선물 하나에, 이대로 이담 대신 나욱을 깊이 사랑할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