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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솔 Aug 06. 2024

22화. 이 흉터는 내가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남겼다.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려고.

  “이담아, 내가 뽀뽀해달라면 어쩌려고 누나가 말하는 건 다 해주겠다는 말을 했어?”


  “누나가 보여달라면 보여줘야죠. 근데 어떻게 꽃을 보여줘요?”     


  “아니, 꽃 보여달라는 거 말고. 뽀뽀….”     


  “아….”     


  나는 이담에게 우리 집 근처에 벚꽃이 예쁘게 핀 곳이 있는데 그걸 보러 가자고 말했다. 이담은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내가 이담을 데려간 곳은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뒤편의 공원이었다. 그 공원에는 정자가 있었는데, 정자 근처의 나무는 전부 벚나무라 바람이 불 때마다 꽃비가 떨어졌다. 나와 이담은 그 정자에 앉았다.   

  

  정자에 앉아 잠깐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보다가, 이담의 턱을 살짝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이담은 누나, 이건 뽀뽀가 아니잖아요. 라고 말했다.      


  “누나 이럴 거면 그냥 방을 잡는 게 낫지 않아요?”     


  그날은 이담이 미웠다. 나를 뭐라고 생각하냐는 물음에 어떻게 그냥 친한 누나라고 답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냥 친한 누나랑 키스를 하고 잠을 자는지. 팔 아픈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나는 너무 상처받았다. 이게 다 나의 능력 부족, 외모 부족 때문인 것 같았다. 이담에게 학업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저녁에 울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엄마에게 울면서 내 꿈은 좋은 남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거라고 했더니, 엄마가 그건 너무 추접스러운 꿈 같다고 했다. 남자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자신의 의미를 찾는 것은 추접스럽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행복한 나의 가족을 갖는 게 얼마나 어렵고 큰 꿈인데, 하고 반발심이 들었다. 남자도 잘 만나야 하지, 애 낳고 몇 년이나 잘 키워야 하지, 잘 죽기까지 해야 하지…. 물론 엄마가 한 말의 뜻을 이해는 하나 그때 마음은 그랬다.     

 

  이맘때쯤, 최은영의 씬짜오, 씬짜오를 읽었다. 프롤로그에서 인용한 문장, 어떤 관계는 너무 소중해서 부서졌을 때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졌는지 모호하다는 대목. 나는 떠났다고 하고 싶지만 남겨진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담은 떠나는 중이고 나는 남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떠났고, 남겨졌고.     


  막냇동생에게 이 일을 고백했다. 그리고 유튜브 ‘오마르의 삶’ 채널의 대충 ‘미성년자가 성인과 사귀면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영상은 10대 후반이든, 20대 초반이든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면 서로의 나이 차이 때문에 더 어린 사람의 회로가 망가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회로가 망가진 채 나보다 어린 이담을 만나, 이담의 회로까지 망가뜨렸다는 죄책감에 울었다. 막내는 의외로 담담하게 내게 말했다.     


  “언니, 원래 사람은 다 망가진 채 살아가.”    

 

  난 막내의 입에서 나온 어른스러운 말에 순간 오잉, 했고. 의외로 위로를 받았다.      


  내 몸에 인대 봉합 수술 흉터라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 이담이 나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억울했는데, 이 말을 막내에게 하자, 막내는 그냥 누가 물어보면 ‘내가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낸 상처’라고 말하라 했다. 나는 막내의 너무나 맞는 말에 또 오잉, 했고 또 위로를 받았다.     


  이담이 내 팔을 분지른 그달은, 일상이 너무 버겁던 와중에 휴식을 받았다고 생각하려 했다. 그리고 정말 그동안 못한 걸 하며 휴식처럼 보냈다. 이담에게도 절대 연락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열심히 내 할 일을 하려 노력했다.      


  이담의 생각이 무지하게 많이 났지만, 아니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둑에 난 틈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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