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직후,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더 이상 일정과 회의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반쯤 감긴 눈으로 출근 버스에 몸을 맡기지 않아도 되고, 낮 시간 햇빛을 맘껏 볼 수 있었으니까요. 비로소 내 이름으로 일하며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있었죠. 자유는 손안에, 밝은 미래는 나를 기다리는 듯했어요.
하지만, 통장은 정직했습니다. 원하는 일을 얻은 대신 수입이 끊겼죠.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은 거죠.
고정급여가 끊긴 자리에는 지출만 남았어요. 대출이자, 관리비, 각종 보험에 생활비까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마련해 둔 통장 잔고가 눈에 띄게 줄더라고요. 은행 앱 속 숫자는 나를 조롱하듯 매일 모래처럼 푹푹 꺼졌어요.
수입이 끊기자 체감적으로 지출이 배가 된 것 같았어요. 너무 버거웠습니다.
직장에 있을 때 의식하지 못한 안정망이 얼마나 큰 버팀목이었는지, 그제야 뼈저리게 알았습니다.
인생의 잔인한 평가표가 은행 계좌였어요.
돈만 줄어든 게 아니었어요. 멘탈도 함께 추락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명함이 사라지자, 스스로 위축되기 시작했어요.
요즘 뭐 해요?
라는 질문이 예전엔 가벼운 안부였는데, 이제는 칼날처럼 느껴졌어요.
씩씩거리지만 여전히 회사 잘 다니는 친구들 보면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맘껏 하는 후배들을 만나니, 그날 차림이 더 초라하더라고요.
저와 달리 다들 생기와 생동감이 넘쳐 보이더라고요.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다그쳤어요.
내가 잘못 선택한 건 아닐까?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이대로 주저앉게 되면 어떡하지?
해결책을 찾고 싶었지만 눈앞에 그 방법이 보이진 않더라고요. 발 딛고 설 땅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물길 위에서 방향을 잃고 흔들렸습니다.
동시에 내 안의 또 다른 목소리가 조용히 속삭였어요.
돌아가면 다시는 이 질문을 할 수 없을 거야.
네가 정말 원하는 삶은 무엇이었을까?
이 목소리가 없었다면, 아마 다시 안락한 자리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안정된 일상을 찾아 비집고 들어갔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첫 6개월은 추락의 연속이었어요. 통장 잔고도, 마음도, 바닥을 향후 곤두박질쳤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바닥에서 새로운 것이 움트기 시작했고, 버티고 이겨내자는 오기가 생겼어요. 그야말로 어떻게든 '생존'해내자 했습니다. 이 절박함이 내 안의 창의력을 끌어냈고, 두려움이 나를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새 길로 들어서는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문열 작가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소설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추락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추락은 내가 날개를 준비하는 과정이었어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이문열, 1988)
한때 명성과 성공을 누리던 주인공은 사회적 성취와 개인적 욕망을 좇으며 살았지만, 점차 모순과 균열 속에서 무너져 간다. 권력과 부, 사랑과 관계를 붙잡으려 하지만 그것들이 오히려 그의 삶을 갉아먹으며, 결국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추락하는 과정에서 그는 잇따른 배신과 상실을 겪고, 자신이 의지하던 기반들을 하나씩 잃는다. 그러나 그 고통과 몰락의 과정은 단순한 파멸이 아니라, 그동안 가려져 있던 인간 존재의 진실과 자기 내면을 마주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의 몰락담이 아니라, 추락을 통해 다시 날개를 얻고자 하는 갱생과 성찰의 이야기다. 무너지는 순간이야말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자리라는 역설적 메시지를 담아내며, 독자에게도 ‘추락은 끝이 아니라 시작’ 임을 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