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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Sep 07. 2022

첫 운동의 기억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아이는 없다. 

난 선천적으로 운동 신경이 없다. 몸치다. 몸치의 사전적 의미는 ‘노력을 해도 춤이나 율동 등이 맞지 않고 어설픈 사람’이다. 운동할 때나 춤을 출 때 어떤 동작을 해도 어색해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간단한 홈트 영상을 따라 하는데도 새로운 동작이 나오면 영상을 멈추고 ‘저 사람이 오른손은 어떻게 했지?, 왼손은 어떻게 했지?, 다리는 어떻게 했지?’, 하고 하나씩 살펴본다. 새로운 운동을 배울 때,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하고 간단히 알려주는 코치를 만나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당최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이건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된 거지 어렸을 때는 내가 몸치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린이와 신체 활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아이가 몸치 건 뭐건 간에.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계단에서 많이 굴러서 걷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셨다고 했다. 계단에서 굴렀던 건 나도 기억난다. 6살 어느 날, 아파트 계단에서 데굴데굴 굴렀고 그때 마침 계단참에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난 계단참까지 구른 후 벌떡 일어나 아주머니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했고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깜짝 놀라서 바라보셨다. 계단에서 구른 것 중 기억나는 건 그때 한 번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 걸 보면 아마도 익숙했던 일이 아닐까.


      

7살, 엄마를 졸라 동네 태권도 학원에 갔다. 그때만 해도 태권도를 배우는 여자아이가 많지 않을 때라 관장님은 날 귀여워해 주셨다. 관장님께서 “태극 1장”하고 외치면 모두 같은 동작을 하는 게 신기하고 멋졌다. 관장님은 아이들 사이사이를 다니며 동작을 교정해 주셨는데 난 항상 엄지손가락을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감싸듯이 주먹을 쥐었다. 관장님은 매번 주먹을 이렇게 쥐면 안 된다며 안에 있는 내 엄지손가락을 밖으로 빼주셨다. 안 그래야지, 생각하는데도 자꾸 잊어버렸다. 볼 땐 멋있었는데 태극 품새를 외우는 건 나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 많은 동작을 어떻게 외우는 걸까. 게다가 태극 1장만 있는 게 아니라 2장, 3장, 4장, 무려 8장까지 있었다.     



난 겨우 태극 1장만 외울 수 있었는데 그것도 헷갈리기 일쑤였다. 태극 2장부터는 다른 사람을 눈치껏 보고 따라 해야 했는데 방향을 잘 못 틀어 옆 사람과 마주 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떤 동작이냐에 따라 앞사람 또는 옆 사람을 보며 따라 해야 해서 내 눈은 사방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다른 아이들이 눈치챌까 싶어 어찌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도 계속 태권도를 다닌 건 태권도 학원에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권도 수업이 끝나면 A와 함께 학원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수업을 마친 관장님이 버스를 몰고 올 때까지 우린 상가 앞 계단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같이 수업받던 아이들도 가고 우리 둘만 계단에 나란히 앉아있을 때면 A는 나에게 물었다. 

“너 사탕 먹을래?”

난 항상 고개를 끄덕였고 A는 가방에서 레몬씨 사탕을 꺼냈다. 새콤하고 가운데는 더 새콤한 타원형 모양의 사탕. A는 캡슐 안에 들어있는 레몬씨 사탕을 손가락으로 툭 하고 밀어내 내 손에 얹어 주었다. 그러고는 매번 하는 같은 말. 

“관장님 보시기 전에 얼른 먹어.”

난 왜 관장님이 보시면 안 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급하게 입에 사탕을 넣었다. 아무도 모르는, 우리 둘만 아는 사탕 먹는 시간. 새콤하고 달콤하고 두근두근했던 짧은 시간. 사탕이 녹으면 생기는 기다란 틈에 혀를 베이지 않게 조심해야 했던 것도 기억난다. 가슴 졸이는 태권도 수업 시간이 끝난 후 보상처럼 주어지는 시간이었다.


      

태권도 수업에서 태극 품새를 하는 시간보다 더 긴장됐던 시간은 바로 겨루기 시간이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대체 누구와 겨룬단 말인가.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와는 겨뤄야 했고 난 짝을 찾지 못한 나와 비슷한 또래의 통통한 남자아이와 시합을 하게 됐다. 두려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손과 발을 마구 휘둘렀다. 상대가 무슨 공격을 하는지 어떻게 방어하는지 하나도 보지 못했는데, “와!”하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이런. 상대 남자아이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아니 얘는 왜 내 공격을 피하지 못한 걸까. 

“우아, 너 대단하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날 칭찬했다. 어쩌면 이런 일이. 내 실력과 상관없이 겨루기에서 이겼다.


      

때가 된 것이다. 태권도 학원을 그만둘 때. 난 겨루기에서 상대 남자아이의 코피를 터트린 후, 깔끔하게 태권도 학원을 그만두었다. 고작 일곱 살이었는데 손뼉 칠 때 떠나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걸까. 3개월 동안 이어진 눈치 보며 하는 태극 품새 시간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고 그 스트레스는 A가 주는 레몬 사탕으로도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만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겨루기 시합에서 어떤 남자아이의 코피를 터트렸는데 그만뒀다며 아쉬워했다. 난 정말 딱 좋은 시기에 그만둔 것이다.      



간혹 운동에 성공한 경험도 있었다. 난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탔는데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양옆으로 기우뚱거리며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열심히 구르는데 같은 동 13층에 사는 7살 남자아이가 날 놀리는 거다. 

“우아, 초등학생 누나가 두 발 자전거도 못 탄다!”

어느 날은 더 직접적으로 기분 나쁘게.

“얼레리 꼴레리, 저 누나 보래요. 네 발 자전거 탄대요!”

하도 놀려대서 자전거를 타는 날이면 혹시 그 애를 만날까 봐 신경이 쓰였다. 제발, 오늘은 만나지 않기를. 하고 마음속으로 바랐지만 놀 공간이 뻔했던지라 난 자전거를 탈 때마다 십중팔구 그 아이와 만났고 놀림을 받았다.      



신기한 건 놀림받는 게 싫었으면 자전거를 안 타면 되는데 난 꾸준히 자전거를 탔다. 그때도 지금처럼 운동을 못 했지만 좋아했었나 보다. 그 아이의 놀림이 심했던지 ‘내가 이놈의 보조 바퀴를 떼고야 만다!’ 하고 결심했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드디어 보조 바퀴를 떼고 두 발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두 발 자전거를 타고 그 아이 앞을 쉬익 지나간 날이 생각난다. ‘내가 뭘 타고 있는지 보란 말이다!’ 하며 의기양양하게 지나갔지만 그 아이는 ‘오.’하고 말았다. 그 반응이 약해 무척 아쉬웠다.      



그러나 어쨌든 난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날 놀렸던 그 아이가 없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지금도 가끔 그 아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자전거를 탈 수 있어서 누릴 수 있었던 많은 일이 머릿속에서 지나간다. 특히나 여행지에서 타는 자전거는 얼마나 많은 걸 느끼게 하는지. 시각과 청각, 촉각, 후각이 모두 활짝 열린다. 몸치지만 간혹 이렇게 성공한 경험이 있어서 계속 몸을 움직이고 싶다. 남들보다 느리고 어설프지만 결국은 나에게도 다른 세상이 열렸다. 운동하지 않았으면 경험할 수 없었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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