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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19. 2022

초등학교 때의 운동 (피구)

그때는 왜 그렇게 피구를 많이 했을까.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체육 시간에 피구를 많이 했다. 주로 홀수 번호와 짝수 번호로 팀을 나눴다. 번호는 기역, 니은 순이었는데 1번인 여자아이는 성이 ‘공’이었고 2번인 난 성이 ‘김’이었다. 공교롭게도 ‘공’은 우리 반에서 가장 키가 컸고 나는 그다음으로 키가 컸다. ‘공’과 나는 거의 항상 다른 편이었다.     



피구는 은근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게임이다. 아니, 논란의 여지가 많다기보다 규칙을 지키지 않고 서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다 보니 가끔 언성이 높아졌다. 

“너 맞았어, 나가!”, “아냐, 땅볼이었어”

“어, 선 밟았어!”, “무슨 소리야, 선 안 밟았어!”

“너 손에 닿은 것 같은데?”, “안 닿았어. 누구 본 사람 있어?”

언성이 높아진다. 홀수 번호에서 가장 키가 큰 ‘공’-성만 기억나고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이 싸우려고 가슴을 내밀고 나온다. 그럼 짝수에서 가장 키 큰 내가 출동한다(슬프게도 그때 키가 지금 키다). 딱히 별다른 논리를 내세우며 다툰 건 아니고 그냥 가슴을 내밀고 “야!, 야!” 했던 기억이 난다.      



가끔은 방과 후, 다른 반과의 피구 시합도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끼리 반별 피구 대항전을 했다. 난 피구를 전혀 잘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커서인지 아이들이 끼워줬다. 여자아이들이 피구를 하면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응원하러 온다. 난 피구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반 남자아이들의 응원을 받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요즘과 달리 아파트 주차장에 차가 많지 않았다. 특히나 낮에는 주차장에 차가 거의 없어서 우린 주차장을 공터처럼 사용했다. 주차장에서는 바닥에 선이 필요한 놀이를 많이 했는데 그중 하나가 피구였다. 피구를 운동장이 아니라 주차장 한가운데서 한 거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피구를 할 때 아웃당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은 경기가 중간 정도 진행될 때다. 제일 처음도 마지막도 안 된다. 제일 처음에 공을 맞고 나가면 아이들의 머릿속에 ‘쟤는 못하는 애’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끝까지 남는다면, 내가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된다면, 그건 정말 큰 일이다. 내가 아웃당하면 게임 끝이기 때문에 같은 편은 내가 잘하고 오래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런데 난 그저 머리가 하얄 뿐이다. 마지막 남은 아이는 모름지기 두 손으로 공을 탁 받고 바로 상대편으로 휙 던져 공격할 줄 알아야 한다. 난 그게 안 된다. 운이 좋아 몇 번 피하다가도 어느 순간 공이 내 정면에서 날아오면 ‘어, 공이 온다, 온다, 피해야 하는데, 피해야 하는데.’ 하다가 그냥 퍽! 맞는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공은 항상 슬로모션으로 나에게 오는데 희한하게 피할 수가 없다.    


  

한참 신나게 반 대항 피구를 하다가 어느 경기에서 내가 거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같은 팀 아이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그날 창피를 당한 이후로 피구와 멀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피구와 가까웠던 적도 없었다. 중년인 지금 ‘피구’를 떠올리면 피구를 하는 나보다 핏대를 올리며 무작정 우리 팀을 옹호했던 내가 생각난다. 고개를 하늘로 높이 들고 가슴을 내밀며 내 쪽으로 걸어오는 ‘공’도 생각나고. ‘공’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나에게 힘차게 걸어온 것처럼 힘차게 잘살고 있기를.  ‘공’과 목소리를 높이던 나는 지금과 무척 다른 나다. 지금의 나와 너무 달라 신기하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다.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며칠 전, 내 지갑에 있는 딸아이의 첫 증명사진을 발견했다. 딸아이가 다섯 살 때 여권을 만들기 위해 찍은 사진이다. 어머나. 다섯 살 아이가 너무 귀엽다. 또랑또랑한 눈, 동그란 코, 앙다문 입술. 너무 사랑스러워 눈을 뗄 수가 없다. 다섯 살 때 온 가족이 함께 사진관에 가서 찍었던 생각이 난다. 아이는 커다란 사진기 앞에 혼자 앉아서 어쩔 줄 몰라했었지. 

“자기야, 이 사진 좀 봐!”

남편을 불렀다. 남편도 한참 동안 사진을 본다. 그러더니 딸에게 “얘 어디 갔어? 얘 좀 데려와.”라고 농담을 했다.      



열두 살 딸은 어릴 적 자신만 귀엽다고 하는 엄마, 아빠에게 삐졌는지 뾰로통한 얼굴이 된다. 그러더니 남편과 나에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걔는 세상에 없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야.” 

아이가 말을 마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도 내 눈물이 갑작스러워 고개를 돌리고 다른 일을 하는 척했다.      

‘치,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못된 것. 바로 너잖아!’ 속으로만 말했다. 아이가 어릴 때 동요를 개사해서 부르던 일, 뭐만 하자고 하면 “신나요!”하고 방방 뛰던 게 생각났다. 친정엄마는 아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신나요’라며 너무 귀엽다고 하셨다.  


    

서운했지만, 사실 지금 아이의 모습도 지나면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요즘 아이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뭘까. 생각했다. “방방이(아이 별명), 예쁘다!” 이 말인 것 같다. 심심할 때 들으라며 내 핸드폰에도 그 말을 녹음해 놓았다. 요즘 아이의 정서 상태는 극과 극인데,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입을 꾹 닫고 방에만 있다가 기분이 좋으면 “역시 나야!” “난 너무 예뻐, 방방이 예쁘다!”란 말을 하며 옆에 있는 사람을 정신없게 만든다.     



다섯 살 아이를 떠올리며 그리워했지만, 사실 지금 아이의 모습 안에 다섯 살 아이도 다 녹아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충분히 사랑받고 응원받아 지금의 성격을 가지게 됐을 테니. 5학년 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는 많이 다르지만 사실 그 많은 시간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가 됐을 것이다. 잘 보이지 않아도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가슴을 내밀고 “왜? 왜? 우리 팀이 왜?”하고 눈을 크게 뜨던 내가.      



너무 찌그러져 살아서인지 그런 모습이 나에게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못 찾겠다, 꾀꼬리. 이제는 나와라, 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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