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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30. 2022

행복한 운동 돌려막기

동생은 얼마 전 자신의 큰아들과 함께 어린이 바둑대회에 다녀왔다. 어린이 대상의 바둑대회임에도 단상 위에는 나이 드신 바둑기사들이 쫙 앉아계셨다고 했다. 동생은 으레 대회 앞에 있는 개회사가 한없이 길어지겠다는 예상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고 했다. 분명 돌아가며 긴 연설을 할 것이고 아이들은 떠들 것이고, 개회사가 끝나면 저들은 사진을 찍고 바로 집으로 돌아갈 텐데 왜 대회 전에 이런 과정이 있어야 하는지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고 했다.      



개회사가 끝나고 드디어 어린이들의 대국이 시작되었다. 동생은 자기 아들을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는데 단상 위에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 펼쳐졌다고 했다. 무대 위로 책상 여러 개가 올라오더니 바둑기사들도 두 명씩 짝을 지어 대국을 시작한 것이다. 짝이 맞지 않았는지 ‘몇 급인 모 바둑기사와 대국할 기회를 드리겠다. 정말 흔치 않은 기회이니 학부모님 중에 관심 있으신 분은 무대로 올라오셔라.’ 하는 방송까지 여러 번 나왔다고 했다.      



동생은 연설만 하고 갈 줄 알았던 나이 드신 바둑기사들이 즐겁게 바둑 두는 모습을 보고선 웃음이 나왔던 모양이다. 무언가를 그렇게 좋아하고 즐기는 모습이 멋졌다며 동생은 그날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동생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테니스 선생님이 생각났다. 요즘 테니스 붐이라 그런지 테니스 선생님은 쉴 시간도 없이 계속 이어서 레슨을 한다. 피곤하고 힘들 텐데 내 공 하나하나에 다 피드백을 해주고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해 주고 자세를 수정해 준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다음 주 월요일에 수업을 못 한다고 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대회를 나가신다고 했다.

“선생님처럼 잘하는 사람도 대회에 나가요?”

“그럼요, 저 대회 나가는 거 좋아해요.”

선생님의 눈이 반짝 빛났다. 테니스를 정말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뿜는 에너지가 있다. 좋은 기운이 있다.     



코로나 19가 유행하기 전에 1:1 수영 강습을 받았던 수영장에 요즘 주말마다 자유 수영을 간다. 함께 수영하러 간 친구에게 “여기 어쩌면 3년 전에 나 가르치던 선생님 있을지도 몰라.” 하며 두리번거렸다. 그 선생님은 항상 나에게 어떤 영법을 하라고 말씀하시고는 레인 끝부분에 서서 하품을 하며 졸려하셨다. 이 시간을 그냥 때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친구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친구는 내 말에 바로 이렇게 대꾸했다. 

“그런 사람이 아직까지 있을 리가 없잖아. 수영에 진심인 사람도 아닌데.”

난 ‘오~’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인 사람에게만 나오는 에너지, 그런 에너지를 뿜는 사람을 선생님으로 만나는 건 정말 행운이다.      



요즘 내 생애 중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외주 일은 내가 할 수 있을 만큼만 받고 아이도 커서 예전보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 드디어 책을 읽고 글을 읽고 운동을 할 시간이 생겼다. 매일 아침 아이가 일어나기 전, 스트레칭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테니스와 필라테스 강습을 받고 주말엔 수영, 평일에 두 번은 한강을 달린다. 아침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며  굳은 몸을 풀어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몸이 찌뿌둥하다. 운동의 시원함, 개운함을 알아 버렸다.      



테니스 코트장에 가서 공을 잘 치지 못해도 괜찮다. 나에겐 또 다른 운동이 있다. 수영장에 가서 유튜브에서 본 대로 얼굴이 물 밖에 나왔을 때까지 코로 숨을 뱉고 짧게 숨을 들이쉰다. 가끔은 되고 가끔은 안 된다. 평영을 손으로 물을 잡듯이 팔 동작을 한다. 잘 안 된다. 그래도 괜찮다. 필라테스 선생님에게 팁을 얻는다. (필라테스 선생님은 여러 운동을 섭렵했다) 선생님은 “테니스는 여기 코어에 힘을 걸고 팔을 움직여야 해요.” “평영을 잘하려면 등 근육을 사용해야 해요.”하고 팁을 준다. 필라테스를 하면서 코어에 힘을 주는 방법과 호흡으로 몸을 유연하게 하는 방법을 배운다. 물론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 괜찮다. 나에겐 달리기가 있다. 후후, 흡, 후후, 흡. 호흡하고 탁탁 발을 구르고 손은 배꼽 앞에 북이 있는 것처럼 북을 치듯 앞뒤로 움직인다. 달리기는 내 컨디션에 따라 속도를 조절할 수 있으니 잘하고 못 하고 가 없다. 사랑해요, 달리기. 한 운동을 못 해도 다른 운동이 있으니 즐겁게 운동할 수 있다.      



큰 목표가 있는 건 아니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도 수영장 몇 바퀴를 쉬지 않고 돌고 싶은 목표도 없다. 그저 이렇게 쉬엄쉬엄 계속 재미있게 운동을 하고 싶을 뿐이다. 가끔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생기기도 한다. 이렇게 하고 싶은 대로 운동해도 되나, 시간을 써도 되나 하는 걱정. 그러나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지금 이 시간을 충분히 누려야겠다. 나중에 되돌아볼 때 조금의 후회도 없도록. 이 시기가 얼마나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좋은 기운을 뿜 뿜 내뿜어야지. 바둑대회의 나이 드신 바둑기사처럼, 테니스 선생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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