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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30. 2022

초보는 장비 빨

어떤 운동을 시작할 때 운동에 필요한 도구를 잘 구매하지 않는 편이다. 언제 그만두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에 비해 남편은 운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거의 필요한 운동 도구를 구매한다. 필요한 운동 도구를 사고 나면 그게 아까워서라도 계속 운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나와는 상관없다. 난 어떤 운동이 하기 싫어지면 어떤 장비를 구매했느냐와 상관없이 그만둬버린다.

‘장비값은 장비값이고 시간은 금인데 하고 싶지도 않은 운동을 하느라 수고하는 그 시간이 더 아깝지. 시간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잖아.’라고 합리화한다.      



테니스를 시작한 후 첫 두 달은 라켓도 구매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목이 삐끗하고 보니 나에게 맞는 가벼운 라켓을 구매할 필요성을 느꼈다. 남편은 기왕 장비를 구매할 거면, 테니스화도 사라고 했다. 테니스를 할 때는 공을 치기 위해 급히 뛰어가다가 멈추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테니스화가 발목을 보호해 준다고 했다.     



제일 가벼운 라켓으로 구매하고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샀다. 발이 꽉 껴서 사장님께 한 치수 큰 걸로 달라고 했더니 이 정도면 작은 게 아니라 딱 맞는 거라고, 테니스화는 운동화와 달리 꽉 맞게 신는 거라고 하셨다. 살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테니스화를 신고 테니스를 해 보니 왜 테니스화를 딱 맞게 신는지 알 것 같다. 발목이 흔들릴 공간 없이 딱 고정된다.      



새로 산 장비들을 착용하고 테니스를 친다. 형광 분홍 줄을 맨 화사하고 가벼운 라켓, 내 발에 딱 맞는 테니스화, 손목을 잘 고정해 주는 손목 밴드. 든든하다. ‘이렇게 장비를 다 샀으니 계속 테니스를 해야겠지?’ 하고 물음인지 다짐인지 모를 혼잣말을 한다.      



요즘 테니스가 MZ 세대에게 인기인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예쁜 옷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쁜 옷을 입고 테니스 코트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인스타에 올리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형택의 테니스 유튜브를 즐겨보는데 여자들은 대부분 예쁜 테니스 복장을 입고 나온다. 

‘흥. 다들 겉멋만 들었군. 그냥 츄리닝 입어도 되는데 말이지.’

난 콧방귀를 뀐다. 입이 삐죽 나와 같이 유튜브를 보는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아니, 실내에서 테니스를 치는데 테니스 모자는 왜 쓰는 거야? 참 내.”

매달 드는 테니스 레슨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옷이라니 안 될 말이다. 난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츄리닝 바지에 면티를 입고 테니스를 치러간다. 10분만 치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땀이 주르륵 흐른다. 티셔츠에도 땀이 묻어 셔츠에 얼룩무늬가 생긴다. 레슨이 끝나면 땀을 닦고 얼굴을 양산으로 가린 채 누가 볼까 얼른 집에 오기 바쁘다.      



그런데 테니스를 계속 치다 보니, 전용 복장이 있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어떤 옷이 땀 흡수가 잘 될까. 고민할 필요도 없고. 요즘은 환절기라 테니스를 치러 갈 때는 추운데 테니스를 칠 때는 금방 땀이 나 덥다. 오늘도 옷장을 열고 테니스를 할 때 어떤 옷을 입을지 한참 고민했다.      



옷장의 옷을 살피고 있노라면, 어릴 때 읽었던 슈베르트 위인전 내용이 생각난다.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 엄청 가난했다. 빈 궁정 아동 합창단 시험을 보러 가야 하는데 아무리 옷장을 봐도 다 해진 옷뿐이다. 슈베르트는 그중에 가장 나은 회색 옷을 입고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옷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미성의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슈베르트는 빈 궁정 예배당의 합창단에 뽑히게 되었다. 는 이야기. 내 옷장 안의 회색과 검은색 톤들의 옷이 흡사 슈베르트의 옷장(본 적은 없지만.)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나는 슈베르트와 달리 반전의 실력은 없지. 흠. 슈베르트가 입었다는 회색을 떠올리며 나도 회색 맨투맨티를 입는다. 그 반전의 기운을 받고 싶은 소망을 품고.      



테니스 레슨을 받으며 깨닫는다. 아직 난 옷 살 때가 아니야. 츄리닝 바지에 면티면 충분해. 멋지게 차려입고 허둥지둥 어설프게 공을 치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지.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어설프지 않은 실력을 갖추게 되면 그땐 사야지. 꼭 테니스 복장을 살 필요는 없지만 복장을 갖추어 입는 건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다. 재미를 위해 테니스를 치는데 재미를 더할 수 있다면 겉멋인들 무슨 상관일까. 생각이 바뀌었다.      



남편은 러닝 할 때 입는 반바지에 스포츠 양말, 러닝셔츠를 입고 테니스를 친다. 땀이 많이 나는지 가끔은 땀 흡수가 되는 헤어밴드도 한다. 말을 안 했지만 처음엔 남편의 헤어밴드가 조금 우스워 보였다. 그런데 며칠 전 테니스를 칠 때 너무 뛰어다녔는지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로 땀이 쏟아졌다. 남편이 왜 헤어밴드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유튜브 영상의 여자가 왜 실내에서 왜 테니스 모자를 썼는지도 알겠다. 난 단발머리인데 공을 치려고 뛰어다닐 때마다 머리카락이 눈앞을 가려 제대로 테니스를 칠 수가 없다. 테니스 모자를 쓰면 머리카락이 딱 고정되어 테니스 치기가 편하다. 저번 주에 처음으로 테니스 모자를 쓰고 레슨을 받았다. 뭔가 더 잘 되는 느낌이다. 장비를 갖추는 데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장비빨이란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테니스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에게 적어도 테니스화는 사서 신는 게 좋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발이 안정적으로 고정되면 훨씬 스텝 밟는 게 편하다. 테니스 라켓은 한 달 정도는 빌려서 써 본 후에 코치님께 자신에게 맞는 라켓 무게를 추천받아 구매하는 것이 좋다. 손목 밴드도 사는 게 좋다. 땀이 날 때 밴드로 흐르는 땀을 닦을 수도 있고 손목 부상을 막을 수도 있다.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는데 그건 장인이니까 그러는 거다. 초보자에게는 장비가 중요하다. 오랜만에 러닝을 시작했을 때 정강이가 많이 당기고 아팠는데 신발을 러닝화로 바꾸고 나니 증상이 싹 사라졌다. 모든 장비를 구매할 필요는 없지만 운동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는 운동의 재미를 더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에는 킥판을 샀다. 내가 다니는 수영장은 자유수영일 때는 개인 킥판만 사용이 가능하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 킥판이 있으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아 구매했다. 가방에 들어가지 않아 집까지 큰 킥판을 한 손에 들고 왔다. 거실에 있던 남편과 아이가 놀라 눈이 동그래진다.

“뭐야? 이 킥판은? 설마 산 거야?”

남편의 물음에 딸도 한 마디 덧붙인다. 

“헐. 엄마, 수영을 일 년도 더 배웠으면서?”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난 서둘러 대답했다. 

“그래, 킥판 샀다. 처음 한 바퀴는 킥판 잡고 발차기를 해야 몸에 열이 올라 좋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말이야,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매주 토요일 아침, 난 보란 듯이 킥판을 겨드랑이에 끼고 수영장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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