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사나이? '럭키비키' 양희수②
너는 작은 솔씨 하나지만
네 안에는 아름드리 금강송이 들어있다
너는 작은 도토리알이지만
제 안에는 우람한 참나무가 들어있다
너는 작은 보리 한 줌이지만
네 안에는 푸른 보리밭이 숨 쉬고 있다
- 박노해 시인의 <너의 때가 온다>
양희수 러너는 요즘 묵묵히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는 지금도 훌륭한 러너다. 올해 9월 21일 철원DMZ마라톤에서 8등을 차지한 것 외에도 많은 것을 이뤄왔다. 하지만 그는 요즘 인생이 제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2022년 풀코스 PB(2시간 44분)를 세운 후로 기록이 정체돼 있어서다.
“2022년 가을 PB를 세우고 나서 2023년 1월에 언더아머 앤드류 레이스에서 연락이 와서 동마 우승 프로젝트를 준비했어요.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 금주하고 일주일에 180~200km씩 뛰면서(한 달 러닝 마일리지 500km 이상) 몰입했죠. 훈련 시간이 인천에서 오전 7시라 매번 새벽 5시 첫차를 타고 갔어요.
그렇게까지 훈련을 열심히 했는데 대회 일주일 전, 러닝화를 바꾼 게 실패요인이었는지 동마 기록이 2시간 48분으로 나왔어요. PB를 갈아치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져서 울었어요. 스포츠는 결과로 그사람의 노력을 말하는 분야인 것 같아요. 과정에서 힘을 많이 쏟은 거에 비해 결과가 안 나오니 속상하더라고요.”
양 러너도 기록이 잘 안나와서 우는 때가 있군요?
그럼요. 원하는 기록이 안 나와서 울 때 많죠. 2021년엔 바디프로필까지 찍을 정도로 식단 열심히 했는데 기록이 마음만큼 좋지 않았어요. 작년에도 제마(JTBC마라톤)에서 풀코스 2시간 39분을 목표로 세웠는데 목표 달성을 못했어요. 근데 그땐 제가 훈련을 열심히 안 해서 납득했어요.
아마 최근의 성적에 대해 아쉬움이 큰 것은, 그가 러닝 초창기에 성장속도가 워낙 빨랐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는 런린이이던 시절(1편 참고), 중랑구 육상연맹에 가입을 해서 50~60대 고수 러너들과 훈련을 했다.
“저랑 함께 뛴 분들이 마라톤 경력 20~30년 되는 분들이셨어요. 그분들과 토요일날 아침 7시에 13km씩 뛰고 망우산 등등 인근 산 둘레길 뛰었어요. 여름에는 우중런 계속하고 중랑천도 12km씩 매일 뛰고요. 저는 풀코스 기록이 2시간 48분인 50대 아저씨 러너를 따라서 뛰면서 레벨업 했죠. 예를 들어 12km를 뛴다고 하면, 8km까지는 그 분하고 같이 가다가 마지막 4km에서 그 분이 페이스를 올리시면 따라가려고 애썼어요. 당연히 처음엔 못 따라갔죠. 1km 430페이스도 힘든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과 발맞춰 뛸 수 있게 되더라고요? 페이스 330까지 따라잡을 수 있게 되니까 10km 기록이 46분 44분 41분 39분... 이렇게 쭉쭉 향상되더라고요? 10km를 38분대에 뛴 게 러닝한 지 6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에요.”
양 러너가 최근 의기소침해 있는 이유는 ‘운이 없어서’다. 실패 경험이 빈번해지면서 스스로 운이 없다고 생각한단다.
왜 스스로를 불운의 사나이라고 생각해요?
올해 동마도 못 나갔고요. 가을 춘마 본 접수도 실패해서 10월에 안 나가요. (서울하프마라톤 자원봉사를 하면 춘마 참가권을 받을 수 있지만 이날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에요. 11월 제마 본 접수 추첨에서도 떨어졌고요. 10월 3일 국제평화 풀코스 추첨에서도 안뽑혔어요. 도쿄마라톤 접수(8월 29일까지) 타이밍도 놓쳐버리고 9월 9일 결과가 발표된 제마 추가접수(풀코스 500명) 추첨에서도 제외됐죠. 이외에 ️KDT 4500 (남파랑길 400km)에서도 1차 서류는 합격했지만 지난 9월 1일에 발표한 2차 면접 결과에서 불합격을 받아들었어요.
필자도 양 러너와 마찬가지로 올해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 메이저 대회 신청에서 모두 떨어진 처지로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끼면서도, 양 러너가 너무 ‘그림자’만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 러너는 이미 충분히 잘 뛰고 있으며 ‘추첨’에 들지 못한 것은 양 러너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춘마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대회 전날 춘천까지 사이클을 타고 가는 나만의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또 제마에서는 시각장애인 동반주자로서 10km를 달린다. 특정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게 그가 운이 없다는 걸 의미하지 않고, 훌륭한 선수가 아니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양 러너와 나눈 대화 녹음본 일부를 AI에게 보내 어떻게 인식하는지 결과를 도출해 보내주었다. A는 양 러너의 런생 이야기를 이렇게 평가했다.
“달리기를 통해 삶의 역경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회복한 한 남자의 여정입니다”
“기록 단축을 넘어 타인의 성장을 돕는 페이스메이커 활동과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통해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가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공감을 선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좌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건강한 열정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실질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책을 출간한다면 서평으로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이를 양 러너에게 보여주니 기분이 밝아진 듯 했다. 7월 첫 인터뷰 이후,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 양 러너의 근황을 더 들었다.
9월엔 그에게 한 가지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9월 중순 상암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나이키제주’ 대회 관련 이야기다. 양 러너는 이 대회 참가자가 아닌 ‘응원자’로 예선 대회가 열린 3일 연속 대회장을 찾았다. 나이키제주 참가자로서 본선에 오르고픈 마음은 굴뚝같지만 다른 대회와 일정이 겹친다고 했다.
“저랑 예선전 같이 나가자고 연락왔던 동생들(33세, 28세) 둘을 서로 매칭해줬어요. 그리고 저는 이들이 훈련하는 거 봐줬고 예선도 응원하러 갔어요. 그래서 이친구들 팀명이 ‘양코치의 아이들’이었죠.”
‘양코치의 아이들’ 기록은 3분 39초(1lap 1분50초44 / 2lap 1분48초56). 덩치 큰 친구들 가운데에서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양 러너(35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팀명이 실제와 역전된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다음주 있었던 철원DMZ마라톤도 양 러너에겐 큰 이슈였다. 대회 며칠 전, 양 러너가 필자에게 연락이 와서는 이렇게 자신감있는 어조로 말했다.
“저 이번 주에 철원에 가서 입상할 예정이에요. 꼭 PB 달성하고 올게요!”
철원DMZ마라톤은 쌀이 잘 나는 지역 특성상 코스에 그늘이 없고 평야가 많아 러너들의 훈련 명소로 통한다. 양 러너는 휴대폰에 최근 3년간 대회 코스와 시상자 목록을 저장해두고 분석할 정도로 이 대회에 진심이다. 철원 대회에 나가면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는 (4등이나 7등이나 상금이 같기 때문에) 7등 이내에 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양희수 러너의 철원DMZ 대회 10km 기록
22년 9월 04일 -> 37분 43초
(10.24km)
23년 9월 10일 -> 36분 36초(남자 10km 5위)
(10.04km)
24년 9월 8일 -> 36분 42초(남자 10km 3위)
(10.11km)
25년 9월 21일 -> 36분 09초
(10.10km)
그리고 대회 당일 연락이 왔다. 8등을 해서 입상을 못했다고. 그가 참가한 10km부문은 오전 9시 10분에 출발을 했다.
“매년 9월8일~10일 대회였는데 이번에는 2주 정도 뒤인 9월 21일에 열려서 조금 덜 더울 줄 알았는데...아침 7시~7시 반에 철원DMZ 고석정 도착할 때는 선선해서 좋았는데 9시 출발할 때 해가 떠서 여전히 더웠어요.”
양 러너의 올해 기록은 36분09초20. 7등을 한 고승범 선수(36분05초19)와의 격차는 단 4초였다.
“5km를 반환하고 나면 순위를 대략 알 수가 있잖아요? 보니까 제가 8등 확정이더라고요...고승범 러너가 배가 아픈지 페이스가 점점 떨어지고 선수랑 거리가 벌어져서 저랑 가까워지는 게 보였어요. 8km~9km 지점 가기 전에 제가 따라잡아서 7등이었는데 마지막 200~300m를 남기고서 다시 잡혔어요.”
아! 엎치락 뒤치락 치열한 입상권 다툼... 맴찢이지만 관전잼! 이것이 스포츠의 묘미이리라. 양 러너는 7등은 트로피와 10만원을 받는데 8등인 본인은 입상자가 아니라 아무것도 못받는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초반에 김대성, 오승민, 스피로스 이민우, 심우열 등 10km 33~34분대 러너들과 무리 지어서 1km를 3분 23초 페이스로 달렸어요. 매년 코스가 달랐는데 올해 코스는 작년하고 동일했어요. 7km 이후부터는 평지+내리막이었는데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해서 제가 후반부에 퍼진 것 같네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양 러너가 얻은 것도 있다. 그는 대회 전의 다짐대로 런생 PB는 못 세웠지만 '철원 대회에서의 PB'를 세웠다. 그리고 연대별 1등을 차지해 철원 오대쌀 20kg도 받았다.
맘껏 울어라
억지로 버텨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테니
바람이 널 흔들고
소나기 널 적셔도
살아야 갚지 않겠니
더 울어라
젊은 인생아
져도 괜찮아..
넘어지면 어때
살다보면
살아가다보면
웃고 떠들며 이날을
넌 추억할테니
세상에 혼자라 느낄테지
그마음 형도 다 알아 짜샤
사람을 믿었고 사람을 잃어버린 자
어찌 너 뿐이랴
남성듀오 노라조가 2010년 4월 발매한 노래 ‘형’은 양희수 러너의 애창곡이다. 코노에서 그가 이 곡을 부르는 모습을 보며 가사가 그의 인생과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가 오늘을 추억하기를, 웃고 떠들며 ‘한 때는 혼자라 느꼈지만 지금 보니 내 곁에는 많은 이들이 있더라’라고 회상하기를, 이번 인터뷰가 그에게 큰 힘이 되기를 혼자 속으로 바랐다.
그의 다음 대회는 9월 28일에 열리는 뉴발란스 런유어웨이 마라톤이다. C그룹에 배정됐지만 오히려 럭키비키다. 늦게 출발해서 A그룹 주자들을 제치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