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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명운 Apr 27. 2018

21. 외출

  엄마의 걱정 때문에 밖에 나가 놀 수 없었던 은우에게는 하루하루가 감옥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를 하고, 숙제를 하고 나면 TV에서 만화 영화가 방영되는 시간까지 혼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또 그렇게 재밌게 보던 만화 영화도 함께 맞장구치며 보던 은수가 없으니 재미가 반감되는 것이었다.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을 볼 때는 함께 숨죽이며 보다가, 만화 영화가 끝나고 나면 전투 장면을 흉내 내며 뒹굴던.. 함께 할 동생이 없으니 만화 영화도 점점 시시하게 느껴지고, 그것마저 끝나고 나면 저녁을 먹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순미와 미연이네가 거쳐간 방은 아직 비어 있었고, 혁이 아빠가 택시 기사를 그만두고 대청도에 들어간 지 2주가 지났다. 혁이 엄마도 진즉에 혁이 아빠를 따라 들어갔어야 했건만 은우 엄마 때문에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1~2주 정도면 괜찮아질 거란 은우의 생각과 달리 엄마는 한 달이 넘도록 반 감금 상태로 은우를 집에 가둬 두고 있었다. 그런 은우를 안타깝게 여긴 혁이 엄마가 조심스럽게 은우가 밖에 나가 노는 것에 대해 얘기를 꺼내 봤지만, 은우 엄마는 완강했다. 결국 혁이 엄마도 은우에게 ‘네가 좀 더 참고 버텨야겠다’라는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똑같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TV 만화 영화가 끝나고 침울하게 앉아 있는 은우에게

  - 은우야, 아빠랑 고모네 놀러 가자. 

  - !?

  은우는 예상치 못한 아빠의 말에, 반짝이는 눈으로 아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셋째 고무부가 사우디에서 왔대. 아빠랑 고모네 가서 놀다 오자.

  은우는 좋으면서도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아빠와 미리 얘기가 돼 있었던지 엄마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은우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아빠에게 물었다.

  - 근데, 엄마는?..

  - 엄마는 집에서 쉬라고 하고, 아빠랑 둘이 가자.

  은우는 섭섭하면서도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엄마가 같이 가면 더 좋았겠지만, 같이 간다고 하더라도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아빠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선 은우는 눈부신 햇살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빠랑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이 좋으면서도 어색했다.     


  - 어른 하나, 국민학생 하나 주시구요. 주택 복권도 두 장 주세요.

  버스 정류장 가판대에서 토큰을 사면서 복권도 함께 구입하는 아빠를 보며 은우는

  - 아빠, 그거 왜 사?

  가끔씩 아빠가 TV를 보며 복권을 맞춰 보는 걸 보아 온 은우는 한 번도 당첨되지 않는 복권을 매주 사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 부자 될라고 사는 거지.

  - ?..

  그 한마디로는 은우에게 설명이 부족했다 싶었던지,

  - 1등 당첨되면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서 은우 책상도 사주고, 은우 방도 따로 주고..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더 많이 사 줄 수 있으니까.

  - 당첨 안 되면 일주일에 천 원씩 버리는 거잖아.

  - 안 되면 겨우 천 원 버리는 거지만, 당첨되면 1억 벌잖아.

  은우는 차라리 아빠가 그 버리는 천 원을 자기한테 주면 장난감이든 과자든 살 수 있으니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버스 뒷좌석에 은우와 함께 앉은 아빠는 은우에게 학교생활을 비롯한 이런저런 질문들을 했다. 늘 잔업과 야근에 피곤해하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버스를 타고 30분쯤 지났을 때, 다행히 은우의 멀미가 더 심해지기 전에 은우는 아빠와 함께 정류장에 내렸다. 정류장에서 내려 10분쯤 걸어가자 고모네 집이 나왔는데, 고모네 집은 생각보다 꽤 컸다. 은우네 동네에 있는 앵두나무집과 비교할 건 아니었지만 은우네 집보다는 훨씬 컸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는 아빠에게 은우가 물었다.

  - 아빠, 여기가 고모네 집이야?

  - 응.

  - 이 집이 고모네 꺼야? 고모네 이렇게 부자야?

  - 이 집은 혜미 할아버지 집이야, 고모부 아버지 집. 

    고모가 고모부한테 시집와서, 여기 들어와서 사는 거고.    

  - 아유, 오빠 왔어요? 어서 오세요.

  ‘지이잉’하는 소리와 함께 철제 대문이 열리면서 2층 현관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고모가 보였다.

  - 안녕하세요.

  - 어유, 그래. 은우 왔구나. 들어가자. 들어가요, 오빠.

  계단을 올라가는데 고모부도 현관 앞으로 나와 은우 부자를 맞아 주었다.

  - 어서 오세요, 형님.

  아빠는 고모부와 악수한 손을 힘있게 흔들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 고생했네, 박 서방.

  은우 부자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은우 고모의 시아버지 되는 혜미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혜미 할아버지는 중풍 후유증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했지만 몸은 꼿꼿한 분이었다. 이제 막 돌이 지난 혜미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재롱을 떨고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나온 은우 부자는 거실로 나와 고모부와 마주 앉았고, 고모도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와서 함께 앉았다. 

  - 아이구 형님, 힘든 일 치르실 때 곁에 있어 드리지도 못 하고..

  - 아유, 됐어. 해외 나가 있던 사람이 뭘..

  - 그래도..

    그나저나 아주머니는 좀 괜찮으세요?

  - 흐음.. 아직, 그냥 그렇지 뭐..

  - …….

  어른들 대화에 무료함으로 두리번거리는 은우를 본 고모가

  - 은우야, 심심하면 2층에 올라가도 돼. 혜미 방에 장난감 많으니까, 거기 가서 놀아도 되고.

  은우는 과일 몇 점을 집어먹고 조심스레 일어나 집 안을 살폈다. 볕이 잘 드는 큰 창으로 마당과 화단이 보였고, 반대편 거실 안쪽으로 2층으로 가는 계단이 보였다. 은우가 올라가고 싶으면서도 함부로 돌아다니는 게 조심스러워 망설이고 있는데,

  - 은우야, 괜찮아. 올라가 봐.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고모의 말에, 그제서야 은우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2층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는데, 어디가 혜미 방인지 알 수 없었다. 복도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열린 방문 틈으로 알록달록한 블록들이 보이는 게 그곳이 혜미 방인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블록에 인형, 미니카 같은 은우에게는 하나도 없는 장난감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은우에게 있는 자기 물건이래야, 지겹도록 읽은 동화책 한 질과 딱지가 전부였다. 또래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싸구려 프라모델 하나 없었고, 미니카 같은 건 상상도 못했다. 은우는 TV 광고에서나 보던 블록으로 이런저런 조립을 해보면서, 엄마 아빠가 자기한테도 이런 블록을 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저것 만들어 볼 수 있으니 금방 싫증이 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블록을 가지고 놀면서 방 안을 둘러보던 은우는 멋진 스포츠카 모양의 미니카를 발견하고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른 신발 정도 크기의 미니카는 바닥에 스위치가 있었는데, 스위치를 켜니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제자리에서 세 바퀴 돌고 직진하다가 다시 세 바퀴 돌고 직진하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은우는 뒤로 당겼다가 놓으면 앞으로 가는 작고 조잡한 모양의 미니카만 보다가, 이중 모션으로 소리까지 내며 가는 정교한 모양의 미니카를 보니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갖고 싶었다. 

  - 은우야~ 점심 먹자~     


  고모네 식구와 함께 맛있는 점심을 배 터지게 먹고 나서 은우는 디저트로 티백 홍차를 마셨다. 고모부가 외국에서 사온 것이었는데, 처음 마셔 보는 그 맛이 쌉쌀하면서도 달았다. 맛도 맛이지만 은우는 티백 자체가 신기해서 마시면서도 몇 번을 담갔다 빼기를 반복했다. 

  차를 마시고 일어날 때가 될 때까지 미니카를 손에서 놓지 않는 은우를 보고, 고모부는

  - 은우야, 그 미니카 선물로 줄 테니까 은우 가지고 가.

  - 네?! 정말요?

  은우는 횡재 같은 선물에 감사하며 고모부에게 ‘고맙습니다’를 반복했다.     


  고모네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은우는 아빠의 손을 잡는 대신 미니카를 양팔로 가슴에 품었다. 버스 안에서도 미니카를 품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은우를 보고 아빠가 물었다.

  - 그렇게 좋아?

  은우는 대답 대신 무한 긍정의 표시로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미니카를 품에 안고 행복해하는 은우를 보다가.. 지갑을 꺼내서 복권을 만져 보더니, 피곤한 듯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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