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잡한 남자의 조잡한 사랑 기억
그녀의 목소리가 보일러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위로해줘야 할지,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 마냥 대화의 주제를 바꿔야 하는 건지. 누군가의 슬픈 얘기를 이렇게 덤덤히 들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덤덤한 것도 아니야. 다 이해한다는 척. 전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를 마친 그녀 때문에,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울지 않겠다고 수백 번 다짐했던 내가 우스워보였다.
몇 살 때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친척 누나가 생일선물로 초록색 로보트를 사다 줬다. 버튼을 누르면 주먹이 날아가는 장난감이었다. 몇 번 가지고 놀지 않았는데, 나중에 꺼내보니 오른손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오랜만에 동네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친구 집에는 한창 유행하던 골드런 장난감 세트가 있었다. 변신 기차도 있었고, 유행하는 로봇 컬렉션이 있었다. 그리고 내 장난감은 오른손이 없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친구 집 비누는 괜히 냄새가 좋았다. 변기 물도 여기저기 튀지 않고 조용히 내려갔으며, 벽지는 유난히 반짝거렸다. 놀다 가라는 친구 어머니의 목소리는 정말 차분했다. 언제 가더라도 항상 과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나는 눈치 보여서 함부로 먹지 못했다.
왜 항상 나의 것들은 조잡해 보였을까. 최고를 가장한 싸구려로 점철된 기억. 살짝이라도 건들면 파스스 먼지를 뿌리며 구멍이 뚫리던 방충망 때문에, 모두에게 동일할 것 같았던 밤의 사유마저 싸구려였다. 모기가 빨아먹던 내 피도 친구 집의 모기처럼 빨갛지는 않았다.
나의 사랑도 그러했다. 사랑의 탈을 쓴 호감이 자꾸 자신이 진짜 사랑이라며 박박 우겨댔다. 좋아하던 여학생이 이사 가면 금방 다른 아이가 좋아졌다. 러브레터를 써놓고 얼마 뒤에는 다른 여학생에게 좋아한다 고백했다. 친구의 골드런 세트가 네 초록색 로보트보다 비싼 건 인정하겠어. 네 사랑이 싸구려인 이유는 뭔데? 바보야. 진짜 사랑은 떠나가지 않고 오래도록 머무는 거야. 그렇게 쉽게 쉽게 변하는 걸 누구 앞에서 진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
나는 사랑에 검정 물감을 섞으며 탁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내 물감은 딱딱하게 굳어있어서, 혼자 사랑을 더럽히는 쓸데없는 짓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싸구려였어도 나름 충만했는데. 어제도 누군가를 사랑했고,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내일도 누군가를 사랑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만큼은 진지했으니까. 끊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이 내 사랑의 이점이었다.
항상 나의 것에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사랑만큼은 혼자 치고받고 싸우며 내 것도 진짜 사랑이라고 반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가진 것들 중에 무엇이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사랑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만약 로보트의 오른손을 찾았다면, 그건 친구 것보다 나았을까.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 조잡하다. 오늘은 모기도 없는데 왜 이러는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