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유하는 사유 Aug 04. 2020

나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을까?

내게 전해지지 않은 사랑 고백

  내일은 오늘보단 괜찮아질 거야. 가끔은 슬픈 날도 그리워질 거야. 우연히 함께했던 거릴 지나면  그댈 추억하게 돼.  다시 만날 것 같아


신해경 - '그 후' 中


  3년 전이었을 거다. 아침 프로그램의 구성작가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세요?


  여보세요. 저는 청년 네트워크 'OOO'팀의 OOO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이번에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연락처는 알고 있지만 차마 연락을 하지 못하는 분들을 대신해서 저희가 연락을 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가 그분께 이 번호를 받아 대신 연락드렸고요.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의 이야기를 그분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합니다.

 

  전화를 끊고,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내게 전화를 걸고 싶어도 차마 전화를 걸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자신이 그에게 내 삶을 대신 전달해주겠다 라는 내용이었다. 분명 그는 딱 그 정도의 정보만 내게 줬다. 그러나 나는 나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그 사람이, 나의 첫사랑이거나 혹은 나를 자신의 첫사랑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얼마 뒤에 내게 전화를 걸어왔던 한 여성과 카페에서 만나 내 이야기를 주절주절 읊어댔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게 연락을 하고 싶어 하는 이가 누구인지 예상이 되냐는 등의 질문에 답했고, 질문의 내용이 쌓여갈수록 자꾸만 나를 궁금해하는 이가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제가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나요? 저희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한동안 연락이 오지 않아 내가 먼저 다시 연락을 걸었다.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아쉽게도 지원을 받지 못해 프로젝트가 취소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날 이후, 한동안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왜인지 그가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학창 시절에는 꿈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에 언젠가는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당당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사랑에 누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어느 누구도 꿈이 뭐냐고 묻지 않는 나이가 되어버렸고, 나는 매력적인 남자의 조건을 다 갖추지 못한 채 성장판이 닫혀버렸다. 과거에는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고백을 전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와 더불어 내가 내 사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고백을 전하지 못하는 남자가 됐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사랑을 전하지 못했을 거라는 기대는 눈물 나도록 행복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믿어왔던 나를, 누군가가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을 거라는 생각. 항상 확신을 갖지 못하는 내게는 큰 선물이었다. 


  나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현재의 사랑을 거부하고, 과거가 됐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노력의 반복이 미련한 짓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고,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이전 03화 왜 나만 싸구려 같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