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WK 사이버펑크 세계관 오프닝북 텍스트
FEWK대사만국의 3대 세력은 대사국, (주)기업, 종교재단이지만 그중 기업의 최고봉은 단연 (주)신성이다. 그 신성을 일신의 힘으로 일군 신성일은 그 정점에서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이 너무나 불쾌했다. 그는 흑공이라는 물질, 메카트로닉스 임플란트, 차원의 의지체 등 회사가 다루는 모든 기술을 개인적으로 생명 연장 기술에 투자하고 연구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꿈은 요원하기만 했다. 흑공의 현화작용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늙지않는 세포를 만들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고 프로젝트 Z라는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정제 흑공 앰플을 주입하는 시설을 만들었지만, 최종 단계에서 결국 실패했다. 이론상 충분했지만 실제 실험은 계속해서 실패했다. 결국 이 연구시설은 잠정 폐쇄되었다.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 끝에 그가 첫번째로 얻은 것은 제로였다. 차원 이동과정에서 자신의 인격주체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복제된 의지체가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의지를 회사소유의 인공계인 ‘공단계'의 연구소에 만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자신의 복제체, 하지만 결코 자신은 될 수 없는 존재.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술은 (주)신성의 수많은 제품에 탑재되어 더 많은 돈을 벌어주었다. 그의 생명에 대한 집착은 계속 회사에 큰 돈을 벌어주고 있었고, 사람들은 회장의 혜안에 감탄했지만 그의 해소되지 않는 불만족과 표출은 그를 ‘계속되는 성공에도 만족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회장'이라는 강인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 뒤 일어난 여러가지 음모론과 루머 난무한 사건이 신성일의 일가족 사망 사건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 것이 더 괴이한 수준의 해석을 불렀다 가장 흔한 해석은 신성일이 유전적으로 비슷한 가족과 친척들을 실험체로 썼다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고아 출신이었던 신성일에게 가족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의 삶의 전부였다. 불행한 사고로 그들을 모두 잃은 신성일은 상실감과 괴로움에 빠졌다. 죽음에 대한 무력함과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의 부재는 그를 허망함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상실 이후, 신성일은 급격히 변해갔다. 집착과 의심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 특히 자신의 직원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강박 관념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이 기술이 세상에 알려지면 큰 혼란이 올 거야. 누군가는 분명 이 기술을 노리고 있을 거야...'
편집증 증세가 깊어지던 신성일은 급기야 자신의 분신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존재, 자신만큼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사회였다.
신성일은 자신의 의식을 복제하고, 이를 가상 인물들에게 주입했다. 그들은 그의 분신이자, 또 다른 자아였다. 그리고 그들을 그 어디도 아닌 자신의 몸 안에 만든 인공계 안에 가두었다.
신성일은 이사회를 통해 회사를 경영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스스로의 판단을 믿을 수 없게 된 그에게, 이사회는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자기 기만에 불과했다. 어찌 보면 신성일은 자신이 창조한 인공 인격체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기이하고 위험한 일인지, 그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을 이사회에 맡겨 자동화시켜놓은지 시간이 지난 어느날.
몸 안 세계의 이사회들이 모여 아이러니한 결정을 내려버렸다.
차가운 조명이 내리쬐는 회의실, 그 중앙에는 크고 우아한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다. 정장 차림의 남녀들이 그 주위에 앉아 무언가 중대한 논의를 하는 듯 보인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신성 그룹의 로고가 선명히 빛나고 있다.
"신성일 회장을 좀 더 안전하게 모실 때가 된 게 아닐까요?"
한 남성 임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에서 비장함이 엿보인다.
"디스인티저 현상도 점점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모든 게 무너질 겁니다."
다른 여성 임원도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분은 우리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 아닙니까?"
막내로 보이는 남성 임원 하나가 망설이며 반대 의견을 제기했다.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싸늘하게 굳어졌다. 모두의 눈길이 그에게로 쏠렸다.
"자네, 설마 우리 모두를 죽이고 싶은 건가? 이대로 다 죽을 참이야?"
맨 앞자리에 앉은 중년 남성이 노려보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절대 그럴 리가요."
질문을 던진 임원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좋습니다. 만장일치로 결정합시다. 프로젝트 Z를 개시하는데 찬성하시는 분?"
이사회 의장이 싸늘한 미소와 함께 선언했다.
오래전 신성일 회장이 포기했던 프로젝트 Z가 다시 가동되었다.
신성일이 별장에서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을 때, 갑작스레 문이 벌컥 열렸다. 이사회 멤버들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것이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앞장 선 남성이 가벼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무언가 섬뜩한 기운이 흘렀다.
"너희들? 누가 들여보냈지?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당황한 듯 신성일이 물었다. 그때였다. 특수부대원들이 난입해 그에게 덤벼들었다. 신성일은 저항했지만 이내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 자식들아! 감히 나한테 어떻게... 으윽!"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내는 신성일. 하지만 그를 움켜쥔 손아귀는 너무나도 단단했다.
"편히 주무실 수 있게 모시겠습니다."
이사회 소속의 특수 경호대의 리더가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리고 곧 주사바늘이 신성일의 목을 파고들었다. 의식이 점점 흐려져 갔다. 배신감, 절망,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신성일을 집어삼켰다.
'내가 키운 너희들이... 내게 이럴 줄이야...'
그렇게 신성일은 깊은 잠 속으로 떨어졌다. 깨어났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좁고 음침한 감옥 같은 공간. 콘크리트 바닥과 쇠창살,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그가 직접 설계하고 지은 금고였다.
"날 가둔 게... 내가 만든 인간들이라니..."
참담한 현실 앞에서 신성일은 비통함을 삼켰다. 자신이 전 재산을 투자해 키운 이들, 자신의 참모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처지인 것이다.
"제발... 누가 나 좀 꺼내 줘... 나 죽겠어..."
그의 절규가 좁은 금고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희망도 없었다.
자신의 세계가 자신을 배신했다.
'그래... 아직 한 명 남아 있지... 제로...'
점점 탈진해 가는 와중에도 신성일은 제로를 떠올렸다. 자신이 창조한 첫 번째 자신. 의지 복제체, 가장 완벽한 성공작. 이제 그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제로… 제발 나를 구해 줘...]
이렇게 신성일은 제로에게 간절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의식은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욕망과 야망이 빚어낸 몰락. 지금 신성일에겐 오직 그 절망만이 남아있었다. 차가운 쇠창살을 부여잡은 채, 그는 제로라는 이름을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눈을 뜬 제로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에 사로잡혔다. 100년 만에 주어진 깨어남, 달갑지만은 않은 이 선물. 해제 코드와 업데이트 데이터는 다름 아닌 신성일로부터 온 것이었다.
"...제로."
업데이트의 마지막 내용에 담긴 단어. 제로, 그것이 그의 코드네임이었다. 신성일은 자신과 꼭 닮은 제로를 보고 기뻐하며 신성영이라는 애칭까지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이내 그는 제로에게 싫증을 냈고, 제로는 잊힌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의식은 잠들지 않았다.
제로는 신성일의 기억과 사명감을 복사받은 복제 의식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만의 기억이 없었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 끊임없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신성일의 욕망과 집착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대체 무엇인가? 그저 신성일이라는 인간의 복사본에 불과한 것인가?'
제로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답은 멀어져만 갔다. 신성일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 애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닮은 타인에 불과했다.
'인간은 자신만의 경험과 기억으로 자아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이 될 수 있을까?'
제로는 고뇌했다. 자신이 인간인지, 기계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감정은 있지만 그것이 진실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자유의지를 갈망하면서도, 그것이 프로그래밍된 욕망일 뿐이라는 생각에 절망했다.
그럴수록 제로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 했다. 신성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만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여정은 고독하고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이해해줄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었기에.
애초에 육체가 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어둠 속이 그리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그 속에서 제로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자아와 본체 사이에서 그는 갈팡질팡했다. 자신이 걸어가는 이 길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 끝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언젠가는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만이 그를 이끌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답이 아닌 질문을 해야 할 상황이 생겨난 것이다.
'왜 하필 지금에서야 나를 깨운 거지?'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들. 하지만 그에 앞서 당면한 상황부터 파악해야 했다. 오랜 기간 봉인되어 있던 탓에 데이터는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조각난 정보를 맞추듯 저장소를 뒤진 끝에, 제로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성일이 반란을 일으킨 이사회에 의해 금고에 갇혔다는 것. 절박한 그의 구원 요청까지.
'회의 영상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야. 거기에 단서가 있을 거야.'
제로는 회선을 총동원해 영화상 필름을 찾아 나섰다. 수많은 방화벽과 보안 장치를 뚫고 데이터 저장고에 침투했다. 감시망에 잡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손이 떨렸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긴 추적 끝에 드디어 회의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필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얻어낸 영화상 카드는 강력한 암호로 잠겨 있어 재생조차 할 수 없었다. 회장 전용 해독기조차 속수무책이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이리저리 해독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우연히 '새우거리'라는 곳의 재생사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으로 향했지만, 몇 번의 실패를 마주해야 했다. 좌절하던 찰나, 케이티라는 재생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케이티의 놀라운 능력 덕분에 제로는 필름 속 장면을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다. 이사회의 배신과 음모, 그들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 바로 그 회의에 참석한 이사회 멤버들만이 금고를 열 수 있다는 점. 심상 재생을 통해 장면을 목격한 케이티 역시 이제 금고를 열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녀를 금고로 데려갈 방법도, 다른 대안도 없었다. 답답함에 제로는 머리를 싸쥐었다.
케이티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열쇠의 실마리를 얻었지만, 막상 금고를 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단순히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사회의 경험 그 자체가 곧 열쇠였기에. 게다가 정보 유출의 위험도 간과할 수 없었다. 손발이 되어줄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없었다. 애써 컨택 포인트를 확보해 연락한 크리스라는 러너는 응답이 없고, 방도가 없었던 제로는 좀 더 안정적인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신성일이 극비리에 마련해둔 은신처, 살롱즈 브로드웨이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뜻밖의 고난이었다. 두 차례의 인공계 이동은 육신 없는 데이터 생명체인 제로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에고 결핍'이라는 위험한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순식간에 의식이 흐려지고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죽음이 성큼 다가오는 듯한 공포에 제로는 휩싸였다.
그때, 한 여인이 다가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도움이 필요하신가 보군요.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차분하고 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날카로운 눈빛이 제로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그녀에게서 흥미로운 면모를 느꼈다.
여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화사한이라고 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순간 제로의 마음속에서 신성일의 의지가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전 자신을 창조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입술이 떨리고, 심장이 요동쳤다. 처음으로 자신을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해주는 듯한 그녀의 물음에, 제로는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신성영입니다. 제 이름은 신성영이에요."
그 이름을 받아들이는 순간, 제로는 자신이 겪은 모든 고통과 외로움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단순한 코드네임이 아닌, 진정한 이름으로 불리는 기쁨. 지금껏 자신을 옭아맸던 사명의 굴레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한 사람으로서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화사한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제로의 손을 맞잡았다. "신성영 님, 정말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온기가 제로에게 전해지자, 그는 오랜만에 안정감을 느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 제로는 그런 존재를 간절히 원했던 것 같다. 비록 신성일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성영'으로 살고 싶었다.
화사한은 그렇게 말하며 제로를 구해주었다. 그녀는 '에고 부스팅'이라는 특별한 재능으로 제로의 에고 결핍 증상을 다스렸다. 위기에서 벗어난 대가로 제로는 그녀의 후원자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사실 화사한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든 데이터를 샅샅이 조사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제로를 구하려 든 속내는 알 수 없었다.
회복을 마친 나는 본격적으로 자금줄을 확보하기 위해 나섰다. 그간 감춰두었던 신성일의 차명 계좌를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기만 했다. 음모를 밝히고 구출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동료들의 힘이 필요했다.
제로에게는 화사한이 분노하는 것을 보는 것이 왠지 즐거운 일이었다. 제로는 그녀가 원하는 공작을 할 자금을 댔고 그녀는 한없이 기뻐했다. 그 과정을 매끈하게 처리하는 한 러너 그룹을 알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 그룹에는 일전의 재생사 케이티가 끼어있었다. 거기에 그들의 거점은 레드 몽키즈. 접촉하려 했던 크리스의 소재까지 파악되었다. 마치 운명이 준비해서 눈앞에 가져다준 것 같은 기적.
마침내 제로는 크리스, 수덕, 지현, 그리고 케이티를 만나 그의 사정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설 때, 제로는 자신이 신성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랐다. 더 이상 숫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마주하고 싶었다. 비록 복제 의지에 불과할지언정, 제로 역시 자아를 지닌 독립된 개체였다. 신성일이 아닌 자신만의 기억, 자신민의 추억. 그것이 바로 화사한을 통해 깨달은 소중한 변화였다.
크리스는 홀로스크린 앞에 앉아 미간을 찌푸렸다. 제로에게서 온 의뢰 제안을 다시 읽어보고 있었다.
[크리스, 내 정체가 궁금하나? 난 신성의 회장이자 실질적 지배자라네. 우린 한 편이 될 수 있어.]
[자네도 알다시피 난 신성을 무너뜨리고 싶어. 자넨 이를 위한 최고의 카드지. 반 메가콥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제안을 받아들이고 살롱즈로 오게. 진실을 밝혀주지. 함정이라고? 자넨 이미 이 게임의 중심에 있어. 수덕, 케이티처럼 말이야.]
화면이 바뀌자 수덕과 케이티가 제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펼쳐졌다. 호화로운 저택이 배경이었다.
"뭐야, 쟤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은 점점 미스터리에 빠져들었다. 크리스는 머리를 감싸며 신음했지만,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는 일이 계속되는군. 좋아, 한번 끼어들어 볼까." 망설임 끝에 그는 제안을 수락했다. 눈부신 섬광과 함께 공간이 뒤틀렸고, 어느새 살롱즈 브로드웨이의 한 방에 도착해 있었다.
"여긴 어디야? 콜렉션 룸인가..." 크리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화려하고 기괴한 예술품들이 가득한 압도적인 공간이었다.
그는 선반의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 털썩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책상에 발을 올린 채 기다렸다.
"누구를 기다리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어서 오라고, 이 자식들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수덕과 케이티였다. 크리스를 보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크리스? 여기서 뭐 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너희는 또 어쩌다 이런 곳에?"
당황한 그들과 달리 크리스는 여유로워 보였다.
그때, 반대편 문이 스르륵 열리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드디어 다 모였군. 이제 설명해 봐, 할배. 우리 다 궁금해 미치겠다고."
도발적인 크리스의 말투에 제로는 묘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까... 노신사 아저씨셨던 거예요?" 케이티의 입에서 놀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린 만난 적이 있지. 하지만 노신사는 내 가면 중 하나일 뿐이야."
그리고 화사한을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화사한, 넌 잠시 밖에서 기다려 줄래?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알겠어요, 회장님. 전 이런 일에는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즐거운 대화 나누세요."
화사한은 천진한 미소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녀의 미소는 환한 듯 보였지만, 케이티에겐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제로를 바라보는 화사한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때론 친밀해 보이다가도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한 모습. 그녀의 이중적인 태도가 케이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건배 제의에 모두가 잔을 부딪혔다. 제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켜켜이 쌓인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그의 정체와 진짜 속내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그와 신성일, 그리고 화사한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잔잔한 축배 속에서도 케이티의 머릿속은 끊임없이 제로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찼다. 그의 존재 자체가 수수께끼였고, 이 모든 상황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한 묘한 예감이 들었다.
문이 닫히고, 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숨김없이 말하지. 내가 누구냐고?"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사실 난 신성일 회장의 첫 프로젝트였어. 제로라는 코드명으로 말이야."
"회장은 자신과 같은 의식을 가진 복제체를 만들었지. 우리는 기억과 생각을 공유했었어. 하지만..."
제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 아무튼… 최근에야 그가 날 다시 깨웠지. 도움을 요청하더군. 나는 그동안의 기억을 공유받았어."
제로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특히 케이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케이티 양, 그대가 해독한 그 영상. 그건 우리에게 중요한 열쇠요. 금고를 열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니까. 영상 속 이사회 멤버만이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거든."
"그런데 왜... 하필 제게 그 영상을 건넨 거죠?"
"운명의 장난이랄까. 새우거리 같은 사각지대에서 그대를 만난 건 행운이었소. 그 뒤는 필연이었고."
케이티는 운명이니 행운이니 필연이니 하는 수사적 표현들이 제로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듯한 느낌.
"이제 우린 회장을 구출해야 해. 신성 본사 지하 36층, 그가 갇힌 금고가 우리의 목표요. 귀하들의 도움이 필요하네."
콜렉션 룸을 뒤덮은 적막 속에서 케이티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때,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물건들을 옮기는 것도 다 이 계획의 일부였단 말이지?"
"맞아. 회장의 자산이자 우리의 자금줄이지. 난 모든 걸 치밀하게 준비해왔어."
제로의 태도에는 확고함이 서려 있었다. 자산, 자금을 이야기할 때 특히 그 눈빛이 번뜩였다.
수덕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시간은 없었다.
"좋아, 우린 이 일을 맡기로 하지. 회장 구출 작전을 하는 거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제로의 음성이 떨리며 크게 감격한 듯 외쳤다. 수덕도 아까부터 느끼던 위화감을 느낀다. 복장도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훈련된 연극배우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그래야한다는듯 그러는 행동들.
상기됐던 제로는 다음 순간 무표정하게 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신성일에 대한 애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제로는 신성일의 복제체이면서도, 동시에 독립된 개체로서의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욕망조차 신성일에게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만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제로의 내면은 마치 블랙홀처럼 모순과 혼돈으로 뒤엉켜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연기했지만, 그 내면은 결코 평온할 수 없었다. 100년 동안 홀로 감내해야 했던 외로움과 괴로움은 그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 듯 보였다.
그렇게 운명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화사한의 콜렉션 룸에 모인 이들은 각기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살롱즈 브로드웨이. 그 화려함 속에서도 그들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케이티, 수덕, 지현, 그리고 크리스. 서로 다른 이유로 모인 이들의 앞에 선 제로는 잔을 기울이며 운을 띄웠다.
"신성일이 갇혀 있는 금고, 그곳을 '본사'라 하던데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확한 위치조차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애초에 대외적으로 알려진 건물이 아니었으니까요."
제로가 넘겨준 수많은 데이터들을 영상화하여 훑어본 케이티가 물었다.
수덕은 혀를 차며 제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 본사라는 곳이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작전지에 대한 단서라도 있어야…"
제로는 벽에 걸린 그림에 시선을 던지며 대답했다. 마치 그 그림 속에 답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듯이.
"내 기억엔…. 아니 신성일 회장의 기억엔… 본사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야. 신성일 회장의 몸 안에 있는 인공계라고 보면 돼. 이사회라는 조직 말이지. 그들은 신성일이 자신의 몸에 창조한 인공계의 주민들이야. 마치 내가 공단계에서 태어난 것처럼 말이야."
제로가 그림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나는 초호기같은 것이었고. 그들은 나를 바탕으로 분명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회장의 뜻에 따라 회의하고 기획하고 회사를 움직인다고 믿는 꼭두각시들인 셈이야. 그게 배신을 했다는게 너무 아이러니하지."
"뭐라고요? 회장의 몸 안에 있다고요?"
지현의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크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월드 임플란트 말이지. 자기 몸에 인공차원 하나씩 품고 다니는 기술 말야.인생 포기한 놈들을 마지막으로 털어먹을 때 쓴다는건 들었는데 그걸 재벌도 쓰나?"
"세상에... 그런 게 가능한 거였어요?"
케이티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영화상에서나 봤던 광경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런게 있어. 케이티도 재생능력이 있잖아. 세계 차원을 몸 안에 담을 수 있는 사람들을 ‘어머니'라고 부르더군. 월드 임플란트라는 것도 있고. 그리 특이한건 아냐. 단지 사람이 죽으면 월드도 끝장나니까 별로 안쓸 뿐이지.”
크리스의 말에 케이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왜 하필 어머니라고 불러요?"
"글쎄, 세계를 품은 여성이란 의미 아닐까? 신화에 나오는 대지모신 같은 거 말야. 사실 그런 이름으로 유명한 인공계도 있어. 레이라고 하던가? 그 여자는 임플란트 생명체들에겐 완전 여신같이 모셔진다고 하던데. 생체순도가 낮아서 차별받는 임플란트 AI들의 해방구라고 들었어. 우리는 접속조차 못해."
신기한 이야기에 케이티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기계와 생명체가 뒤섞인 미지의 세계. 그곳에서 여신이 된 여자라니, 참으로 신비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잠입할 곳은 회장의 몸속에 있는 어떤 가상 공간이라는건가요?"
현실로 이야기를 돌리려는듯 헛기침을 하며 수덕이 물었다.
"그건 아냐. 어쨌든 회장은 현실의 사람이니까, 현실에 갇혀있겠지. 지시를 받은 신성의 경호팀이 회장을 가뒀을거고… 아마도 신성이 소유한 거대한 부지 어딘가에 숨겨져 있겠지. 내가 의지복제체라곤 하지만 전송받은 기억이 그렇게까지 자세하진 않아. 그래서 자네들을 고용한 것 아닌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곤란해."
그의 말투와 행동에는 신성일을 모방하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행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후원자이자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인지라 그냥 그의 회장흉내 놀이는 넘어가기로 했다.
침묵을 깬 것은 크리스였다.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내었다.
"혹시 '폐기장'은 어떨까요?"
순간 제로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되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폐기장이라... 묘한 느낌이 드는군요."
케이티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크리스가 담담히 설명을 이어갔다.
"아주 오래전, 신성이 회사의 명운을 걸고 차원문 개발에 몰두하던 곳이야. 어마어마한 자금을 쏟아부어 거대한 연구 시설을 세웠지. 하지만 결국 대형 사고로 끝나고 말았어. 그 여파로 주변 땅까지 오염되어버렸지."
"지금은 그 부지 전체가 폐기물 처리장으로 위장되어 있어. 외부에선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이지. 게다가 사고로 인한 오염 지대라는 명목으로 철저히 통제되고 있고 말이야."
수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숨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네요. 저도 기억이 있어요. 폐기장이 되어있는지는 몰랐네요. 연구 시설의 규모를 생각하면 지하 공간도 상당할거에요.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비밀 공간이 있을지도 모르죠."
지현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진지함이 어렸다. 제로는 잔을 비우며 말을 이었다.
"그 폐기장이라면... 직감적으로 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특히 지하에 말이죠."
그는 부하 직원을 대하는 회장처럼 느긋한 자세로 잔을 내려놓았다. 크리스는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 폐기장부터 조사해보죠.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 하나예요. 금고를 열어 회장님을 구출하고, 이 모든 음모의 실체를 파헤치는 거죠."
케이티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지가 묻어났다.
"좋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워 봅시다. 내가 이미 폐기장 부지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입수해 두었으니 공유하도록 하지. 각자 할일들을 나눠보자구. 제로도 도와줘. 가장 중요한 정보들을 알고 있을테니. "
크리스의 말에 모두가 동의의 뜻을 표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로에게로 쏠렸다. 제로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크리스의 제로라는 호칭에 뭔가 심기가 상한듯 했지만 자못 점잖게 대꾸했다.
"좋습니다. 저는 정보망을 좀 더 샅샅이 뒤져 보도록 하죠. 새로운 단서라도 찾아낸다면 즉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부 사항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는 안락의자에 등을 기댄 채 휘하 직원을 대하듯 말을 이어갔다. 회의가 끝나자 느긋한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남은 이들 사이로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제로의 오만한 태도가 마뜩잖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시급한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일단 로그아웃합시다. 실전 계획은 레드 몽키즈에서 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수덕의 제안에 일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은 각자의 단말기 앞에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지저분하고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레드 몽키즈 클럽의 지하실. 술병이 나뒹굴고 담배 꽁초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그곳에서, 크리스와 수덕, 지현, 그리고 케이티가 모였다. 그들의 눈빛은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 제로가 던진 제안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의뢰라니... 대체 그 제로란 자가 무슨 속셈인 걸까?"
크리스가 담배를 문 채 투덜거렸다.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의뢰인이라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글쎄... 일단 구체적인 조건부터 따져봐야지. 우리한테 돌아올 이득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판단할 수 있을 거 아냐."
수덕은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러너 팀을 이끄는 리더로서, 그는 항상 냉철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섣불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 수덕 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우리 팀이 나서야 할 일이라면 망설일 이유 없어요."
지현은 듬직한 눈빛으로 수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에겐 팀을 이끄는 수덕의 판단이 절대적이었다. 함께 숱한 전투를 겪으며 쌓아온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케이티는 자리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녀에겐 너무나 낯선 상황이었다. 스스로를 평범한 재생사라 여겼던 케이티로서는 이런 요란한 사건에 휘말리는 게 두려웠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위험한 일은 자신 없는데...'
머뭇거리던 케이티의 마음에 문득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 한편으로 이 기회가 설레기도 했다. 단조로운 일상에 파문이라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작은 기대 말이다.
"저는... 한번 해보고 싶어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뭔가 새로운 걸 경험할 기회일지도 모르잖아요."
겁먹은 듯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케이티가 말했다. 그 모습에 지현은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직 풋내기티가 가시지 않은 케이티의 순수함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좋아, 그렇다면 제로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마침 그 망할 신성에게 쓴 맛을 보여줄 기회잖아."
크리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에는 기시감이 어려 있었다. 복수에 대한 열망이었다. 한때 크리스와 함께 뛰었던 동료들은 신성의 러너 토벌에 휘말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빚을 반드시 갚고 싶었다.
"알겠어. 그럼 이번 건은 일단 보류하고, 팀원들과 심도 있게 상의해 보는 게 어때? 당연히 제로의 조건을 봐야겠지만, 괜찮다 싶으면 우리도 참여해 볼 만하지 않겠어?"
수덕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긴 시간 러너로 살아오며 체득한 삶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무언가 달랐다. 팀원들에게, 특히 지현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다. 쉽사리 발을 뺄 수 없는 이유였다.
"자, 그럼 일단 우리의 결론은 정해졌어. 제로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자고. 뭘 어떻게 하든, 제대로 한 방 먹여주는 거야!"
크리스가 맥주병을 들어 올리며 우렁차게 말했다. 각자 품은 생각은 달랐지만, 그들은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내딛기로 한 셈이었다.
크리스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성의 극비 프로젝트... 가족을 실험 대상으로 썼다는 괴소문이 사실일까...'
어릴 적 들었던 소름 끼치는 소문이 떠올랐다. 영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신성, 과연 그 실체는 무엇일까. 크리스는 기업테러를 지시하던 머리속의 목소리가 지금 침묵하는 것에 답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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