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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오션 Jul 25. 2022

얼룩진 그 아이 1

그 아이를 헤면서 기우는 별을 잔뜩 마셨다



감히 나의 아픔에 손을 뻗지 못하고 침묵으로 배려할 때 그 아이는 제 손바닥이 타는 것도 모르고 도닥였다. 








 주변을 잘 살피며 오르다 보면 구멍난 것처럼 수그러진 나무가 있다. 그 사이에 들어가서 수풀을 얼마간 헤치면 탁 트인 공터가 나온다. 낮에는 구름모자 쓴 산할아버지를 실컷 훔쳐볼 수 있고 밤에는 기우는 별을 들이마실 수 있다. 그래서 의자를 갖다두고 나만의 비밀기지로 삼았다. 쫓길 때나 지칠 때는 우리집 뒤에 있는 산에 올라가 공터에 은둔했다.  


 우리집은 뒷산을 숨기기엔 너무 작았다. 얼룩덜룩하게 칠한 놈들이 계속해서 산을 타려 했다. 뒷산은 들이마시기만 할 줄 알지 뱉는 걸 잘 못했다. 놈들이 뒷산을 벌거숭이로 만들려고 앙알거리는데도 한참을 품어주었다. 사슴도 다람쥐도 나도 살갗이 드러난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공터 입구를 베어가진 않았다. 흉하게 구부러진 그 나무는 가져갈 가치도 없었을 거다. 주변은 텅 비었다. 드문드문 나무들이 엉망으로 고꾸라져 있거나 성겨있을 뿐이었다. 입구가 이렇게 도드라지면 누군가 내 비밀기지에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 생각만큼 사람들은 그 요상한 나무에 관심을 들이지 않았다. 우리 엄마를 비롯한 몇몇 어른들이 사태를 파악한다고 한동안 들락거렸다. 나만의 비밀기지를 들키는 건 싫었다. 어른들은 가치를 몰라줄 뿐더러 내가 배치한 의자와 다듬은 꽃과 길러놓은 열매를 따갈 것이 분명했다. 만약 매력을 알아준대도 점유할 게 뻔했다. 어린 놈은 저리로 가라, 라면서 담배나 뻑뻑 피워댈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어른들을 괜시리 쫓아다녔다. 방해된다고 구석에 쫓겨나기만 했지 내가 염려하던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냥 이상하게 생긴 나무구나 생각하며 흘깃 보고 말았다. 그래서 한동안 안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가보니 파란 옷을 입은 또래가 내 의자에 앉아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 아이도 지나치게 창황한 내 모습을 보고 덩달아 당황했다. 여길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기 때문에 우리 마을 아이는 아닐 것이다. 그 아이는 내게 말했다. 잠시 숨어갈 곳을 찾으러 온 거라고. 너도 비밀기지가 필요했구나, 그 지친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차피 들킨 거 그 아이에겐 비밀기지를 공유해주기로 했다. 어스름밤에 별이 가득 찼다. 처음 봤다는 양 탄복하는 그 아이 옆에 앉아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고 신신당부하면서 그날은 지나갔다.  


 우리는 그 후로도 가끔 마주치게 되었다. 그 아이와 나는 좁은 의자를 나눠 앉았다. 양해를 구하는 말도 없이 곁을 내주고 곁을 찾아 앉았다. 새는 지저귀다 가고, 바람이 불면 나무가 가볍게 춤을 추었다. 꽃들은 태양을 쫓으며 환히 웃었다. 우리는 그저 조용히 산할아버지의 근엄한 자태를 보고 있었다. 그런 날이 몇 번 있은 후로, 그 아이는 내가 보이면 반가운 듯이 웃었다. 나도 그 아이를 보며 미소지었다.  


 나의 슬픈 날 파란 옷을 입은 아이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한테 된통 혼나고 어머니에게 달려간 날이었다. 어머니는 매우 바빠서 나를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그랬듯 공터에 몸을 숨겼다. 나는 가끔 이랬다. 가끔 우그렁쭈그렁하게 얼굴을 구기고 혼자 골을 냈다. 여기는 아무리 시끄럽게 투덜거리고 앙앙대도 눈치 주지 않았다. 지렁이도 참새도 개미도 나를 위해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나는 가끔 이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나를 품에 넣어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온난한 손짓이 한참을 머물렀다.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그 아이가 울고 있었다. 나는 서툰 손길로 그 아이를 다독여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받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우린 이후로 만날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인의 슬픔을 덜어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지나가는 모든 곳엔 회한이 스며있어서 나 하나 온전하게 지탱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지렁이도 고양이도 저 혼자 배겨내기 급급해서 감히 나의 아픔에 손을 뻗지 못하고 침묵으로 배려할 때 그 아이는 제 손바닥이 타는 것도 모르고 도닥였다. 그 아이는 그런 걸 한 것이다. 좋은 예감인 줄 알았다. 

 

어느 날부터 그 아이 얼굴을 잘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아이가 보고 싶어 쪼개진 시간마다 공터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 아이를 헤면서 기우는 별을 잔뜩 마셨다. 그런 날이 너무 많아서, 먹구름이 매일매일 나한테서 별들을 숨겨주었다. 


 그 아이가 걱정도 되었다. 혹시 얼룩덜룩하게 칠한 놈들이 그 아이를 해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근 얼룩이들이 옆 마을을 크게 덮쳤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아이는 아마 옆 마을 주민일 거다. 그 아이 소재지를 모르지만서도 옆마을에 무작정 가서 찾아보려 했는데 위험하다고 어른들이 말려대서 그럴 수 없었다. 


 나만 초조한 2주일이 지나서 그 아이가 나타났다. 2주일은 사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닌데도 구태여 안달복달한 것이다. 그 아이는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몸은 성하냐고 물었다. 그 아이는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며 한숨지었다. 소매 아래로 언뜻 푸른 멍이 보인 것 같았다. 어딘가 초조해하는 나를 보며 그 아이도 덩달아 불안해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후로 꽤 자주 얼굴을 비췄다. 항상 피곤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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